음악

2014년 8월 19일 오전 10:13

tiger471 2014. 8. 19. 10:19


“멘델스존은 19세기의 모차르트” 
피아노 트리오 D단조와 슈만의 비평



http://youtu.be/GtaJ9bStLRs
(연주 : 보자르 트리오)

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D단조는 그의 실내악곡 중 가장 사랑받는 곡이다. 베토벤의 <대공>, 차이코프스키의 <어느 예술가의 추억>, 드보르작의 <둠키>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 중 가장 널리 연주된다. D단조의 슬픈 서정성과 우수가 배어 있지만 멘델스존 특유의 우아하고 유려한 표정이 넘친다.

이 곡을 들으면 사라장을 취재할 때가 떠오른다. 사라장은 1995년 애스펜 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브루크 스미스, 첼리스트 린 해럴과 함께 이 곡을 연주했는데, 촬영이 허용된 시간은 20분이었다. 음악제 홍보담당 데비 에어가 옆에서 시간을 재며 감시하는 악역을 맡았다. 나는 뻘쭘한 분위기를 깨려고 “너와 함께 음악을 들으니 참 아름다운 저녁”이라며 너스레를 떨었고, 이 말에 데비가 깔깔 웃은 게 기억난다. 4악장에서 첼로가 우아한 코다를 연주하는 대목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데비는 아름답게 노래하는 2악장이 제일 좋다고 했다. 애스펜 음악제의 추억, 그 행복한 빛깔과 이 곡의 분위기가 기막히게 일치한다.



▲ 펠릭스 멘델스존 (좌·1809~1847)과 로베르트 슈만 (우·1810~1866)

멘델스존은 1835년 아버지를 여의었고, 1837년 세실 장르노와 결혼했고, 1839년 이 곡을 작곡했다. 이제 30살, 성숙하여 무르익는 멘델스존의 모습이 담긴 곡이다. 슈만은 이 D단조 트리오를 평하며 멘델스존을 ‘19세기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그는 스스로 고귀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를 ‘19세기의 모차르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영리한 작곡가입니다. 이 시대의 모순을 가장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화해시키려고 처음으로 노력한 사람입니다.”
- 슈만,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문집>. 이미배 등 공저 <멘델스존, 전통과 진보의 경계>(음악세계) p.280 재인용

슈만이 생각한 ‘19세기의 모차르트’는 어떤 사람일까? 10대의 멘델스존이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천재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피아노 트리오의 맑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도 공감할 만하다. “이 시대의 모순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슈만의 말은, 멘델스존이 과거의 위대한 음악 전통을 딛고 서서 19세기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진정한 천재라는 뜻이었다.




슈만은 작곡가이기 전에 음악 비평가로 활약했다. 그는 1834년부터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통해 글을 발표, 동시대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쇼팽을 발견한 뒤 “여러분, 모자를 벗어 예를 갖춥시다.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한 것도, 베를리오즈의 비범한 천재성을 찬미한 것도, 후배 브람스를 세상에 알린 것도 <음악신보>였다. 슈만이 애정과 기대를 표현한 또래 작곡가 중에는 멘델스존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1835년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음악감독으로 온 뒤 처음 만났고, 1847년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유지했다. 슈만은 비평으로 멘델스존의 이해를 도왔고, 멘델스존은 슈만 교향곡을 지휘하여 세상에 알렸다. 슈만이 발굴한 슈베르트 교향곡 9번 C장조를 멘델스존이 지휘해서 음악사에 복원한 것은 큰 업적이었다. 슈만은 ‘다비드동맹’(Davidbund)이라는 가상의 음악 모임을 만들어 비평을 전개했는데,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슈만의 분신이었다. 플로레스탄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면모라면, 오이제비우스는 조용하고 명상적인 면모였다. 멘델스존은 다비드동맹에 ‘메리티스’(Meritis)란 가명으로 등장한다.

슈만의 비평은 음악작품이나 작곡가에 머물지 않았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선 신흥 부르조아는 급속히 보수화되고 있었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스타 연주자를 구경하려고 연주장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연주회장은 상류층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사교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정작 음악이 시작되면 지루해 하며 졸기 일쑤였다.

슈만에게 속물이란 ‘금박 입힌 문화인’의 동의어였다. 화려하고 고상하게 껍데기를 치장했지만 속마음은 고귀한 예술혼과 거리가 먼 신흥 부르조아를 슈만은 혐오했다. 슈만은 “평온함과 안락함을 생활신조로 삼고 가정의 행복과 탈없는 일생을 바라는” 19세기 부르조아의 세계관을 비판했고, 다비드 동맹에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입을 빌어 19세기의 속물들을 질타했다. 슈만에게 멘델스존은 새로운 베토벤의 길을 열어 줄 ‘19세기의 모차르트’였다.

“그는 (음악사에서) 마지막 작곡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이후에 베토벤이 왔듯, 이 현대의 모차르트 뒤에는 새로운 베토벤이 따라올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태어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슈만, 같은 글. <멘델스존, 전통과 진보의 경계> p.280


슈만이 상상한 ‘새로운 베토벤’은 누구였을까? 19세기의 천재들에게 베토벤은 가장 위대한 음악가의 이상이었고, 도전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베를리오즈, 바그너, 브람스, 말러가 각각 다른 길로 베토벤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그 시도가 모두 실패였다고 섣불리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 분명한 것은 베토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베토벤 자신이었듯, 19세기의 천재들도 베토벤과 비교하기 전에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모차르트가 열어 놓은 자유음악가의 길에서 ‘인류를 위한 바커스’ 베토벤이 탄생했고, 베토벤 이후의 자유로운 천재들은 모두 자기 개성을 꽃피웠다. 수많은 꽃이 만개해 있을 때 어느 꽃이 더 가치있는지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멘델스존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리고 있다. 한스 폰 뷜로는 “멘델스존은 천재로 태어났지만 재주꾼으로 끝났다”고 혹평했고, 20세기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멘델스존은) 부유한 독일 부르조아의 상징”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19세기의 모차르트’라는 슈만의 평가는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1838년 클라라 비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만은 멘델스존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어찌 멘델스존과 나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난 아직 수년간 그에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나에게 배울 점이 있겠지요. 내가 멘델스존처럼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로 성장하도록 운명 지어진 환경에서 자랐다면, 어쩌면 그를 능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슈만은 원치 않는 법학 공부를 하다가 음악에 대한 사랑을 억제하지 못해 뒤늦게 전공을 바꾼 아픔이 있었다. 20대 초까지 그는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생활비도 없이 공부해야 했다. 클라라 비크를 사랑했지만 그녀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아직 결혼하지 못한 상태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복한 가문에서 자라난 멘델스존을 생각하면 자기의 처지와 비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멘델스존을 ‘19세기의 모차르트’라 부를 때, 슈만은 어쩌면 새로운 베토벤이 되어 있을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멘델스존이 죽은 해인 1847년, 슈만은 피아노 트리오 한곡을 작곡해서 아내 클라라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다. 클라라는 첫 악장을 가리켜 “내가 아는 곡 중 가장 사랑으로 가득 찬 작품”이라고 했다. 멘델스존의 트리오와 똑같은 D단조, 두 곡은 잘 어울리는 짝꿍 같다. 두 사람은 좋은 친구였을 뿐,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관계는 아니었지 싶다.



슈만 피아노 트리오 1번 D단조 Op.63
http://youtu.be/-QpEDDKqy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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