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2015년 6월 12일 오후 12:08

tiger471 2015. 6. 12. 12:10

‘피가로의 결혼’과 모짜르트의 혁명
마리 앙투와네트와의 절묘한 인연… 프랑스 혁명과 단두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프랑스 혁명 전야, 굶주리는 민중이 속출하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국민의 아픔을 외면한 채 툭하면 유체이탈을 일삼는 21세기 한국의 아무개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말을 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녀를 미워하던 당시 사람들이 수군대며 지어낸 말이라는 것. 후세에 이와 비슷한 헛소문이 남겨질까 염려된다. “2015년 한국에 메르스 공포가 확산되자 그녀는 ‘젊은이여, 모두 중동으로 가라’고 선동했다”(?)

당시 프랑스 민중들은 오스트리아 왕가 출신의 그녀를 몹시 미워한 게 사실이다. 그녀는 현실을 모르는 발언을 일삼았고, 공문서에서 프랑스말 철자를 잘못 쓰기 일쑤였고, 루이 16세가 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장본인으로 지목됐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느라 국가 재원이 거덜났는데,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런 생활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혁명 1년 전, 큰 흉작으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문제의 ‘케이크 발언’이 유포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호화스레 지낸 건 사실이겠지만, 그게 재정 파탄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성난 민중은 그녀를 구체제(Ancien Régime)의 상징으로 간주, 증오하고 저주했다. 그녀의 잘못도 작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희생양’이 된 측면도 있음을 기억하자.

그녀는 모차르트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났다. 두 사람은 1762년 쇤부른 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당시 6살 음악 신동 모차르트는 황족들이 모여 있는 궁전의 홀 안으로 들어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달려가서 일으켜 세워줬다고 한다. 어린 모차르트는 발딱 일어서서 그녀를 향해 “결혼하자”고 외쳤고, 이 순간 홀 안은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1살 때 프랑스 왕자 루이 오귀스트와 약혼했다. 7년 전쟁이 시작된 1756년, 오스트리아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흥 프로이센과 맞싸우기 위해 숙적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를 위해 왕가의 결혼을 약속한 것. 따라서 꼬마 모차르트의 갑작스런 청혼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셈이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도 장벽이었지만, 그녀가 이미 6년 전 약혼한 사실을 꼬마 모차르트가 어찌 알았겠는가.

그녀는 만 14살 때인 1770년 결혼하여 베르사이유로 갔고, 1774년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18살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됐다. 그녀는 빈 궁정악장이던 글루크에게 음악을 배워서 하프와 플루트를 잘 연주했다. 하지만, 그리 지적(知的)인 왕비는 못 됐던 것 같다. 불어와 이태리말은 물론 독일어 철자도 틀리기 일쑤였다. “그녀와의 대화는 의례적이고 지루했다”는 증언이 있다.


▲ 쳄발로 앞에 앉은 13살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음악을 잘 했지만 그리 지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모차르트와 그녀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악연’을 맺게 된다. 이 작품이 초연된 1786년은 혁명 전야였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알마비바 백작은 하인 피가로의 약혼녀인 수잔나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초야권’이라는 옛 관습을 부활시키려 한다. 호색한으로 유명한 백작은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면서 타인의 잘못은 용서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인간이다. 피가로는 백작의 이기적 행태를 풍자하며 반발하지만 역부족이다. 농민들은 백작을 야유하고 백작부인을 따뜻하게 위로하지만 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백작은 새신부 수잔나를 수풀로 불러내서 밀회를 즐기려 하는데, 백작 부인과 수잔나가 꾀를 내어 옷을 바꿔 입고 현장에 나간다. 꼼짝없이 잘못을 들킨 백작은 부인에게 무릎꿇고 사과한다. 부인이 용서하자 모두 기뻐하며 화해한다.

지배 계급의 부패와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한 보마르셰의 원작 희곡은 1781년에 이미 완성돼 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당신들 대영주는 신분, 재산, 지위를 자랑스러워하지요! 그러나 태어나는 고통을 빼면 그 축복을 받기 위해 당신들이 한 게 무엇이요?” 프랑스의 지배층은 이러한 노골적인 표현이 불편했던 게 분명하다. 보마르셰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친 뒤 1784년 가까스로 이 연극을 파리 무대에 올렸는데, 당시 격분한 귀족과 시민이 충돌해 사상자가 생길 정도였다.

모차르트는 이 직후인 1786년 5월, 빈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초연했다. 그해 시즌 개막 작품 후보로 살리에리의 <악수르>가 경합했는데, 계몽군주 요젭 2세는 놀랍게도 <피가로의 결혼>을 선택했다. 프랑스 왕비였던 누이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를 통해 이 작품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요젭 2세로서는 무척 대담한 결정이었다. 모차르트는 보마르셰의 원작에서 정치적인 부분을 완화하고 사랑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황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 계층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앞서 인용한 원작의 대사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4막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인민이 무장한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혁명을 계획한 사람도 없었고, 목적의식을 갖고 이끈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계몽의 빛(불어 Lumière, 영어 Enlightenment, 독어 Aufklärung)은 이미 각계각층에 스며들어 있었다. 갓 성장한 시민 계급의 지식인은 물론, 상당수 귀족과 관료, 심지어 절대군주인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젭 2세마저 계몽의 세례를 받았다. 칸트에 따르면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미성년 상태란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이용할 능력이 없는 것”을 뜻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제도와 관습은 자연스레 비판의 표적이 됐고, 계몽의 빛 속에서 혁명의 기관차는 이미 거칠게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 <피가로의 결혼> 3막, 민중들이 슬픔에 빠진 백작부인에게 꽃을 바치며 위로한다. 이 오페라는 따뜻한 유머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모색하지만, 이미 프랑스 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오페라가 기나긴 인과의 고리를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과 연결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피가로의 결혼>이 세상에 나오고 3년 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 올랐다. 이 오페라가 혁명을 앞당겼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작을 쓴 보마르셰처럼 모차르트도 이 오페라를 통해 자기 나름의 혁명을 한 게 분명하다. 계몽의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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