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걷다] 투르 드 몽블랑(Tour de Mont-Blanc) 트레킹 ①
광활한 자연이 건네준 그들의 넉넉한 웃음월간마운틴
↑ 레 우쉬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2시간 이상의 오름길을 피하고 편하게 꼴 데 보자로
갈 수 있다. 꼴 데 보자로 내려가는 길에 몽블랑 정상부의 만년설이 빛난다.
유럽의 중남부. 프랑스와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걸쳐 있는 큰 산계 알프스는 피레네 산맥과 함께 북쪽의 유럽대평원과 남쪽의 지중해 연안지역을 기후적ㆍ문화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지형이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 산맥과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비하면 해발고도가 낮지만, 정상부에 발달한 빙하와 뾰족뾰족 솟은 봉우리들, 그리고 삼림한계 위에 펼쳐진 초원 등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고산 풍경을 이루어 세계적으로 수많은 등산ㆍ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 장대한 산맥에서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알프스가 걸쳐있는 국가별로 여러 곳을 늘어놓을 수 있을 테지만, 가장 구미가 당기는 곳을 말하라면 단연코 샤모니-몽블랑(Chamonix Mont-Blancㆍ이하 '샤모니')일 것이다. 도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이 있기 때문이다.
1924년 제1회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는 샤모니는 몽블랑의 발치에 자리 잡아 맑은 계곡과 만년설을 얹은 설산을 품고 있다. 또한 샤모니 출신의 의사 미쉘 가브리엘 파카드 박사와 수정채굴가 자크 발마가 1786년 몽블랑을 초등하여 알피니즘의 시초가 된 일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의 휴식처가 된 샤모니는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익스트림ㆍ레저 활동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6월부터 8월까지의 성수기에는 일반 관광을 비롯해 알파인등반, 암벽등반, 트레킹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 주로 여름에 휴가철을 맞는 한국인들이 찾기 안성맞춤이다. 그 중에서 특별하게 이목을 끈 것이 뚜르 드 몽블랑(일명 TMB)이라 부르는 트레일이었다. 샤모니 내에서만도 갖가지 알프스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길이 많지만, 몽블랑 산군을 중심으로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를 한 바퀴 일주하는 '몽블랑 둘레길'이 있다는 점이 걸어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단지 그것이 장장 200km가 넘는다는 TMB를 찾아가게 된 이유였다.
↑ 알프스 몽블랑 산군을 중심으로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를 지나며 걸을 수 있는 TMB
코스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트레커들이 찾는 트레일이다. '산악관광도시' 샤모니가 베이스캠프로 탁월
환(環) 형태의 트레일 특성 상 TMB 코스도 어느 지점에서나 트레킹을 시작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유럽인이 아닌 바에야 '산악관광도시'인 샤모니를 베이스캠프이자 기점으로 삼는 것이 정보수집과 물품준비를 위해 좋다.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면 샤모니에 이를 수 있으니 현지 교통도 좋은 편이다. 특히 샤모니 시내 외곽에 한국인 조문행 사장이 운영하는 숙소 알펜로제를 이용하면 언어적인 부담도 덜 수 있다는 장점도 겸한다. 여름 기온 상으로는 한국과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습하지 않고 건물 그늘에만 들어서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샤모니에서 TMB 가이드북 및 지도와 행동식 등을 준비하고 불필요한 짐을 알펜로제에 맡긴 후 며칠이 소요될지 모르는 약 200km의 트레킹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TMB 기점은 레 우쉬(les Houches)이다. 숙소에서 발급받은 이용권만 있으면 샤모니 관광구역 내에서는 버스도 기차도 무료기에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TMB를 시계 방향으로 걷는다면 레 우쉬 기차역으로 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으려면 01번 버스를 타고 레 우쉬 종점에서 하차하면 된다. 시계 반대 방향을 선택했다. 레 프라리온(le Prarion)을 오가는 케이블카의 존재 때문이다. 이를 이용하면 비용이 조금 들지만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는 오르막을 건너뛸 수 있다. 100%의 완주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마련된 편의시설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 12.5유로(왕복 15유로)의 비용을 내고 케이블카에 오르니,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인 영국인이 같은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좁은 공간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내 둘이 나눌 이야기는 많지 않다. "너 짐 엄청 크다." "TMB 코스를 걸을 거야." "좋은 생각이다. 넌 9일쯤 후에 저 뒤편 산으로 내려오게 될거야." 영국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반대편 산군을 바라본다. 9일이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TMB를 걸을 일이 막막하면서도 은근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레 프라리온에 도착해 몽블랑 산군을 보며 걷는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꼴 데 보자(Col de Voza)로 가기 위함이다. 꼴 데 보자에는 또 하나의 TMB인 'Tramway du Mont-Blanc'이 지나는 기차역이 있다. 올해로 운행 100년을 맞이한 이 산악열차는 해발고도 2400m에 이르는 레 니데글(le Nid d'Aigle)까지 운행하는 관광열차다. 동시에 몽블랑을 노멀루트로 오르려는 사람들이 이 열차를 이용하기도 한다.
꼴 데 보자에 이르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들이 난잡하다. 지도상에 그려진 길표시보다 더 다양하게 나뉘어있고, 이정표에 적힌 지명들도 생소하기 그지없으니 방향 선택에 혼란을 준다. 믿을 부분은 TMB 스티커가 붙은 이정표 지명을 지도와 대조해 확인하며 가는 것이다. 다음 목적지인 레 샴펠(le Champel)을 향해 길을 잡는다. 레 샴펠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지리산길을 닮았다. 임도 같은 스타일의 길을 걷다가 시야가 열리면 몽블랑 능선이 눈에 들어오고, 작은 마을을 만났다가 숲으로 들어가면 시원한 계곡이 흐른다. 다른 점이라면 만년설이 있는 설산의 비주얼과 빙하수가 넘칠 듯이 콸콸 흐르는 스케일의 차이, 그리고 오며가며 마주치는 트레커들이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레 샴펠에서 점심식사를 하자는 생각은 여지없이 깨졌다. 마을에 들어선 후 레스토랑 한곳 나타나기도 전에 TMB 이정표는 마을을 벗어나는 방향을 가리키는 탓이다. 점차 더워지는 여름의 오후, 확실치도 않은 지도상의 식당 표시만 믿고 코스를 벗어나는 일은 내키지 않는 법이다. 준비한 식량으로 적당히 요기를 하고 길을 잇는다. 다음 목적지인 라 그루바(la Gruvaz)로 가는 길은 작은 마을들을 지나치며 덥고 지루하게 이어진다.
해가 있다고 무조건 걸을 일이 아니다
이정표와 길표시에 의존하며 라 그루바를 지나니 주차장이 나온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주차장 끝까지 갔는데도 길이 없다. 마침 주차장 옆을 흐르는 계곡을 보며 쉬고 있던 두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 정확하지 않은 프랑스어 발음으로 말이 통할리 없으니 지도를 꺼내 보여주며 "Tresse. 트라세? 트라제?"라고 연거푸 묻자 철자를 확인한 한 사람이 따라오라며 손짓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다리로 데려가더니 다리 너머에 살짝 숨겨진 이정표 앞까지 안내하며 '이 길을 따라가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단순히 길 방향만 알려줬어도 될 일인데, 예상보다 큰 친절함을 보여주니 기분이 좋아진다. "메르시(mercy)"라는 말로 거듭 인사를 하고 다시 걷는 길이 한결 즐겁다.
그러나 좋아진 기분과 달리 이어지는 길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길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만나 신발에 양말까지 벗어버리고 차가운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소소한 기쁨은 있지만, 갈수록 더워지는 오후 시간에 덥고 지루한 마을길을 잇는 일이 고역이다. 더운 시간대에는 맥주를 마시며 쉬다가 선선해지면 걷자던 계획도 도무지 파는 곳이 나타나지 않으니 헛된 상상일 따름이다. 지도를 펴 레스토랑이 있는 다음 목적지를 알아본다. '콩타민 몽조이(les Contamines-Montjoie)인가?' 도저히 발음을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동네지만 이곳에 기대를 걸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프랑스의 가게라면 어디나 샌드위치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생크림 와플과 맥주.
출발지와 이름만 같은 레 우쉬를 지나 산책로처럼 열린 숲으로 접어든다. 슬그머니 오르막이 이어지니 안그래도 더운 날씨가 더욱 덥게 느껴진다. 그나마 보이던 설산의 풍경도 가까운 숲에 가려져 재미가 없다. 오직 시원한 맥주만을 생각하며 걸으니 어느 이정표 앞에서 갈림길을 마주한다. TMB 코스는 직진, 이름을 발음할 수 없는 마을은 왼쪽 오르막이다. 아무리 갈 길이 급해도 이곳을 지나칠 수는 없어서 냉큼 마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첫 집'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후, 메뉴판을 훑어보고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맥주 메뉴는 아는 맥주든, 모르는 맥주든 시원하면 그만이니 상관없지만, 함께 곁들일 메뉴가 치즈, 크레페, 와플, 아이스크림…. 하필 자리 잡은 곳이 디저트 가게인 건가? 프랑스의 맥주를 파는 가게는 어디나 샌드위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앉자마자 맥주를 주문한 터라 옮길 수도 없으니, TMB를 걸은 덕분에 달달한 크레페를 곁들여 맥주를 마시는 진기한 경험을 한다.
발음이 맞다면 콩타민 몽조이는 TMB 코스 내에 몇 없는 큰 마을이니 부족한 물품이 있다면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 또 이곳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 문의하니 노트르 담(Notre Dame) 인근에 캠핑장이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라고 권해준다.
일단 노트르 담을 향해 걷는다. 도로를 이리저리 건너며 평평한 길이 이어져 몸이 고될 일은 없다. 그러나 길에 굴곡이 없고 주변 풍경도 비슷하게 이어지니 밋밋하기 그지없다. 노트르 담 근처에 이르면 작은 유원지의 산책로 같은 길이 이어지며, 암벽등반장 등의 캠핑할 곳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해가 긴 알프스의 여름 시즌을 감안해 첫날은 걸을 수 있는 곳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 TMB 트레커들을 위해 마련된 캠핑장 모습. 트레커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소규모 텐트를 치고 캠핑을 즐겼다.
평지의 산책로가 꽤 길게 이어지다가 다시 오르막 산길을 만나는 지점. 이정표 아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이정표에 적힌 소요시간을 가늠해본다. 낭트 보란트(Nant Borrant)까지 45분, 라 발름(la Balme)까지 2시간. 낭트 보란트까지만 가기에는 아쉽고 라 발름까지 가기는 조금 무리인 시간이다. 그 고민이 옆에서도 보였는지 산책을 하던 한 남자가 말을 건넨다. "너 오늘 어디서 잘 생각이야?" "낭트 보란트까지 갈까 싶어." "꼭 그렇게 해. 그 이상을 가기에는 해가 질거야." 참 낯선 장면이다. 프랑스인들은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서 친절하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굳이 본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영어를 해가며 걱정을 해준다. 역시 어느 나라나 사람마다 다른 성향을 지녔을텐데, 몇몇 답답한 경우를 경험한 사람들의 일화를 듣고 프랑스인들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어느 곳이나 친절한 사람은 친절하다.
이정표만큼의 시간을 소비하여 낭트 보란트에 도착했다. 애초 계획은 캠핑을 하는 것이었으나 숲속에 아담히 자리 잡은 산장을 보니 씻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리가 있는지 물어나 본다. "오늘 내가 이곳에 묵을 수 있을까?" "오늘은 모든 방이 다 찼다." "그럼 이 근처에서 캠핑을 할 수 있어?" "10분 정도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캠핑장이 있어." 아예 자리가 없다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10분을 더 걸으니 '왼쪽 길로 100m 가면 TMB를 위한 비박지 있음'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길을 따라 가보니 굉음을 내며 흐르는 하천 옆으로 이미 서너개의 텐트가 설치되어 있다. 적당한 자리를 비집고 텐트를 설치한 후 저녁을 준비하며 생각한다. 주변이 어둡지 않다고 끝을 볼 것처럼 걸을 일이 아니구나. 남은 일정을 생각해 적당히 걷고 일찍부터 쉬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이다.
이튿날 라 발름으로 향하는 길도 거의 평평하게 열린다. 그래도 좌우와 정면으로 우람하게 몸을 세운 바위 능선이 펼쳐지니 산길을 걷는 맛이 있다. 역시 산장과 캠핑장이 있는 라 발름을 지나니 초원이 펼쳐지며 길도 조금씩 고도를 높인다. 드디어 풀이 무성하고 야생화가 만발한 알프스의 너른 초원이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알프스의 초원은 딱 보는 것까지만 즐겁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은 소나 양을 방목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겠으나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나무그늘이 전혀 없어 더울 뿐이다. 그나마 광활한 풍경을 보는 맛으로 견디며 길을 따르지만 수직고도가 높아질수록 풍경보다는 그저 한발씩 내딛는 일이 고작이다. 그렇게 걸어 해발 2300m 정도의 꼴 두 보놈므(Col du Bonhomme)에 도착하니 비슷한 키를 지닌 산 능선들이 쭈욱 펼쳐지며 알프스의 거대함을 뽐낸다. 정상에 오른 기분으로 한숨을 돌리지만 아직 해발 100여m를 더 올라야한다. 조금 완만해진 길을 따라 1시간 정도를 더 걸으니 봉우리 하나를 넘어 산장을 만난다.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구할 수 있는 산장에서의 휴식은 꿀맛이다.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샌드위치 한 조각이나 콜라 한 모금을 먹고 마시며 쉬어가는 풍경도 TMB의 매력 중 하나이리라.
↑ 군데군데 만년설이 남아있는 해발 2000m 이상의 풍경.
산길을 오르고 내리고 다시 오르다
산장에서 길을 나서니 반대로 한없이 내려가는 초원이 펼쳐진다. 위로 오르며 보는 초원과 내려가며 보는 초원의 맛이 또 다르다. 온통 연둣빛의 잔디가 펼쳐진 가운데 곳곳에 작은 건물을 놓여있고 방목한 양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모습. 대자연과 함께 사는 삶의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선사하는 편안함이 있다.
넓고 긴 초원구간을 내려서면 식당 겸 숙소가 있는 레 샤피유(les Chapieux)에 도착한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이곳에 숙소를 잡고 묵어갈 분위기다. 그러나 지도를 펼쳐보니 또 오기가 발동한다. 다음 목적지인 모떼뜨 산장(Refuge des Mottets)까지의 길 대부분이 도로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 다음날 아침부터 지겹게 도로를 걷느니 해가 허락하는 만큼 모떼뜨 산장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도로가 이어지는 저편에는 에귀 데 글라시에(Aiguille des Glaciers)를 둘러싼 만년설과 빙하가 손짓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쉬자'는 전날의 계획을 다시 무산시키며 배낭을 짊어진다.
↑ 레 샤피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양치기 아가씨.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자연스레 V사인을 날려주었다.
결정에 대해 후회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사가 심하지 않다 해도 딱딱한 도로를 밟으며 오르는 길은 갈수록 발바닥에 피곤을 더했다. 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도로의 끝에 있다는 주차장까지 태워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막상 실제로 차 한 대가 속도를 늦추며 "아 유 오케이?"를 외쳤을 때 그저 "오케이~"로 응수하며 보내고 말았다. 차에 탈 공간이 없기도 했지만 아직 힘이 남았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1시간 여를 더 걷자 도로 구간이 끝나고 모떼뜨 산장으로 향하는 흙길이 시작된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깔고 싶지만 공간이 마땅치 않다. '조금만 더'를 되뇌며 걸어 텐트를 설치할만한 공간을 찾았을 때는 슬슬 땅거미가 지기 시작. 한순간의 오기로 이틀째도 무리를 하고만 자신을 자책하며 텐트를 꺼내려는데, 길을 넘어오는 노부부의 모습이 포착됐다. 캠핑장도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내려는 행위를 그들이 어찌 볼까 싶어 노부부가 지나간 후에 텐트 설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산책을 하던 노부부가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애써 무시하며 텐트에만 집중하는데, 노부부 중 아내가 말을 건넨다. "너 오늘 여기서 잘거니?" "예.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서요." 그러자 생긋 웃으며 "잘 자~"란 말을 건네고 노부부는 갈 길을 갔다. 무엇 때문에 움찔거리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자유로움이 당연한 알프스의 정서에 편안한 마음을 느끼며 TMB에서의 이틀째 밤을 보낸다. 에귀 데 글라시에의 뾰족한 봉우리 위로 크고 작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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