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13년 2월 24일 오전 06:44

tiger471 2013. 2. 24. 06:48

 거짓과 진실이 만나는 순간 건져올린 아주 특별한 행복

윌은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평생 모험을 즐겼던 허풍쟁이 아버지는 “내가 왕년에~”로 시작되는 모험담을 늘어놓는다. 젊은 에드워드 블룸은 태어나자마자 온 병원을 헤집고 다녔고, 원인불명 ‘성장병’으로 남보다 빨리 컸으며 만능 스포츠맨에, 발명왕이자 해결사였다. 마을에서 가장 유명인사가 된 에드워드는 더 큰 세상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고, 대책없이 큰 거인, 늑대인간 서커스 단장, 샴 쌍둥이 자매, 괴짜시인 등 특별한(?) 친구들을 사귀면서 영웅적인 모험과 로맨스를 경험했다는데…

하지만 지금의 에드워드는 병상의 초라한 노인일 뿐.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아버지 곁에서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 궁금해진 윌은 창고 깊숙한 곳에서 아버지의 거짓말 속에 등장하는 증거를 하나 찾아내고, 이제 ‘에드워드 블룸의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추적을 시작한다…

 

 

 

 

팀 버튼의 사랑스러운 거짓말
환상적인 화면과 상상력이 팀 버튼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아이와 어른 사이에 놓여진 시간의 간극을 이어주는 법을 알고있다. 이렇듯 사랑스러운 허풍을 떨어대는 허풍장이 어르신이라면, 누군들 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빅 피쉬>의 촬영감독 `필립 루셀롯`이 <흐르는 강물처럼>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빅 피쉬>의 영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로 시작해서 아버지와 아들을 얘기한다는 점이 꼭 닮았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이들 사이의 힘겨운 화해를 담은 영화는 많다. 특히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들은 극적으로 분노와 오해를 삭히고, 사랑의 고백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하지만 부성애와 인생을 정공법으로 진지하게 풀어가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과 팀 버튼의 <빅 피쉬>는 정녕 다를 수 밖에 없다.
<빅 피쉬>에서 아버지 에드워드는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늘 자신의 이야기라며 말을 꺼내지만, 어느새 마녀나 유령 마을, 거인, 서커스단 등 얼토당토 않은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허풍꾼이다. 말 한마디를 시작삼아 뻥튀기를 하면서, 끝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아들 윌은 늘 되풀이되는 얘기에 싫증이 났고 허풍에 진저리를 치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빅 피쉬>는 부자 사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들 윌의 진짜 불만을 드러낸다. 윌은 항상 밖으로 돌며 가정을 소홀히 했던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거라고 의심했고, 아버지가 살아온 진짜 이야기가 아닌 그저 꾸며낸 이야기로 자신을 대하던 모습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거리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몇 년만에 다시 아버지와 마주앉은 윌은, 아버지의 허풍 이야기 속에 진짜 추억들이 조각조각 끼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절대 잡히지 않는 물고기가 있었지.”

아버지의 이야기는 늘 이렇게 시작됐다. 엄청나게 큰 그 물고기는 절대로 잡히지 않았다고. 어떤 굉장한 미끼에도, 절대로.
아버지는 어린 시절, 마녀의 눈 속에서 자신이 죽는 순간을 보았다고 했다. 자신이 죽는 순간을 이미 알아버린 소년은 두려움이 앞섰지만, 한편으로 그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건 용기있게 살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가진 것 하나 없지만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수완좋은 사나이로 묘사한다. 아버지가 누누이 말하던 그 커다란 물고기, 어떠한 미끼에도 잡히지 않는다는 그 물고기처럼 아버지는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항상 메말라 있었어.”

아버지는 죽기 전에 어머니에게 힘겹게 말한다. 그는 깊은 강물속 커다란 물고기처럼 유유히 헤엄치며 살고싶었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는 용기 넘치고 수완좋고 거칠것 없이 그려지기만 했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실제로는 어땠을지, 관객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비단 영화 속 아버지 에드워드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시련없는 젊은 날은 없다. 가진 것 없이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얻고, 전쟁에 나가고, 자식을 낳아 키우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삶 -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이 삶이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는 한편의 모험 이야기, 멋지고 로맨틱한 동화로 뒤바뀐다.
그러나 누가 이 아버지들에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추억으로 삶을 지탱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설사 아버지일지라도, 그가 추억으로 일생을 지탱해 나갈 정도의 작은 허풍은 허락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들 윌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자기를 꼭 닮은 아들이 자신의 삶을 경탄과 존경으로 바라봐주기 원했던 마음, 그래서 평범한 자신의 삶을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각색해서 들려주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소박한 허풍.
환상적인 화면과 상상력이 팀 버튼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아이와 어른 사이에 놓여진 시간의 간극을 이어주는 법을 알고있다. 이렇듯 사랑스러운 허풍을 떨어대는 허풍장이 어르신이라면, 누군들 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스러운 거짓말`을 들어주는 일일지 모른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를 알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연거푸 들어도 지치지 않고 맞장구 쳐 줄수 있는 것.
글 첫머리에 이름을 꺼낸 촬영감독 필립 루셀롯과 팀 버튼이 직조해낸 환상적 화면 말고도, <빅 피쉬>는 재미난 배우들의 연기로 한가득이다. 아버지의 이야기속 젊은 시절을 느물느물하게 소화해낸 이완 맥그리거, 아릿다운 얼굴을 아끼지 않고 마녀로 변신한 헬레나 본햄 카터, 코믹한 시인으로 깜짝 출연한 스티브 부세미, <배트맨>의 펭귄맨에 필적할만한 동물 캐릭터(?)의 서커스단장 대니 드비토의 호연은 <빅 피쉬>를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참, 거인 칼(Karl)은 실제로 2m 29cm 의 놀랄만한 키로 기네스북에 오른 배우, 메튜 맥그로리라고.

Tell Me Lies
어린 시절, 누구나 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한 존재라고 믿을 때가 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면 우리는 그도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가 진부한 설교로 우리의 젊음을 억압하려 든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아버지의 사랑과 지혜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을 때는 흔히 너무 늦게 마련이다. 부모의 인간적인 약점을 용서하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울까.
팀 버튼의 신작 [빅 피쉬]의 주인공 윌 블룸(오랜만에 만나는 빌리 크루덥)은 어느 날 아버지 에드(앨버트 피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임신 7개월의 아내 조세핀(마리온 코띨라르)과 함께 고향 애쉬톤으로 향한다. 마음 속으로 그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황당무계한 모험담 속의 아버지가 아닌 진정한 현실세계 속의 아버지를 알게 되는 기회 말이다.
그러나, 에드는 병석에 누워서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고 어머니 샌드라(제시카 랭)와 아내가 아버지의 말재간에 넋을 잃는 모습을 보며 윌리엄은 절망한다. 정말이지 아버지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인 걸까? 혹시 지난 몇 십년간 그가 가족들에게 보여준 모습까지도 거짓은 아닐까? 그의 마음은 괴롭다.
현실의 세계와 허구의 세계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믿는 이들 중의 하나인 윌리엄은 아버지의 환상을 유치한 허풍이라고 평가절하해 버린다. 하긴 세상에 윌리엄같은 이가 혼자뿐인 건 아니다. 영화며 소설이며 시며 예술 따위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기억해 보면 말이다.
유난히 판타지의 세계에 대한 영화를 많이 만든 팀 버튼은 이 ‘사실주의자’들에 대해 할 말도 많을 게다. 하지만, 어느새 사십도 훨씬 넘긴 팀 버튼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비틀쥬스]나 [가위손], 혹은 [에드 우드]같은 영화에서 상상력이 결여된 중산층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과거의 그가 아니다.
물론 우리네 ‘공상주의자’들은 [빅 피쉬]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열광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시각적인 쾌감은 펠리니도 질투할 만한 서커스 텐트 안에서도 푸른 잔디 위를 맨발로 걸어다니는 전원에서도, 축축하고 음산한 늪가의 저택에서도, 영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젊은 시절의 에드(이완 맥그리거)와 샌드라(앨리슨 로만)의 로맨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거인과 늑대인간, 샴쌍둥이와 마녀같은 존재들에게 보내는 팀 버튼의 애정도 여전하다. 그들은 사악한 괴물이 아니라 외롭고 버림받은 자들, 인생의 변두리에서 자신과 타인들과의 ‘차이’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일 뿐이다.
결국 윌리엄은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허구가 다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 진실은 단지 건조한 산문과 통계숫자와 서류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선함과 위대함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큼 자식에게 기쁘고도 놀라운 발견이 있을까?
영화내내 침대에 누워 말도 겨우 잇는 앨버트 피니를 보는 것은 기적같은 경험이다. 그가 며느리에게 진부한 농담을 들려주는 장면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야기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게 내가 잘 알고 있는 유머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한 채,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빌리 크루덥과 제시카 랭, 스티브 부세미와 대니 드 비토, 헬레나 보냄 카터 등 조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단지, 이완 맥그리거가 연기한 젊은 날의 에드가 노년의 존재감에 밀리는 듯 한 느낌이 안타까웠을 뿐.
[빅 피쉬]는 다시 한 번 팀 버튼이라는 괴짜감독의 천재성을 인식시켜 주는 작품이며 현실과 허구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독특한 감수성에 열광하는 나로서는 [빅 피쉬]가 현실세계 혹은 주류 영화계를 향해 흔드는 그의 항복의 깃발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멀고 먼 훗날, 언젠가 내가 부모님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도 윌처럼 그 분들을 보내드리고 싶다.
거짓말쟁이 어른에 대한 가장 귀여운 변명
<빅 피쉬>는 어른이 된 악동 팀 버튼이 사랑과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첫 번째 고백이다.
빅 피쉬
-거짓말쟁이 어른에 대한 가장 귀여운 변명
<빅 피쉬>에는 세 명의 어린이와 두 명의 어른이 나온다. 영화는 한 명의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무덤에 가기까지 전 과정을 보여주고, 또 다른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그를 이해해가며, 또 다른 어린이가 자라가는 것에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관계는 할아버지 아들 그리고 손자이다. 영화 속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허풍’으로 인해 발생하고 펼쳐진다.
<빅 피쉬>는 크게 두 개의 시간대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시간대가 존재한다. 하나는 아버지인 에드워드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현재이다. 파리 주재 뉴스위크 기자인 아들 윌은 아버지와 소원한 관계이다. 아버지의 거듭되는 거짓말 때문이다. 지금 윌은 에드워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있다. 생이 얼마 남지 않는 아버지께 화해를 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또 하나는 에드워드의 유년기부터 장년기에 이르는 시간이다. 이 시간대는 주로 에드워드가 겪은 현실과 허풍이 뒤섞여 있는데, 그와 윌이 3년 전 다투고 헤어진 것도 바로 이 시간대에 펼쳐진 이야기들 때문이다. 영화는 이곳에서 본연의 환상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윌이 에드워드에게 다가가려 하듯이 실제와 환상은 마지막에 이르러 결합을 시도한다. 두 개의 시간대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시간대는 미묘하게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낸다.

제 삼의 시간대는 다름아닌 아들인 윌의 어린시절이다. 이야기는 수 십년 동안 같은 형태였을지언정 윌이 자라나면서 이야기들은 하나씩 말도 안 되는 허풍으로 변질되어 다가왔고 에드워드를 미워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에드워드가 윌에게 캠프와 침대 머리 맡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이 시간대가 극히 짧게 소개되는 것과는 반대로 일상생활에서 수 백번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팀 버튼은 현재에서 이야기 속의 과거로 뛰어드는 이 시간대를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부자간의 대립항을 극대화한다. 나아가 에드워드와 윌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가장 친근한 한 때였던 이 순간을 극히 짧은 시간으로 표현해 비루한 현재와 환상적인 과거의 대립을 명확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허풍으로 구축된 심리적 물리적 장벽이 놓여있다. 먼저 아버지의 허풍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아들이 지구 반대편 파리로 떠났다는 것이 이를 가장 명확하게 증명한다.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아들이 돌아온 지금, 둘의 사이에 놓여 있는 과제는 죽음까지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의 피를 나눈 부자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팀 버튼은 엉뚱한 방식을 택한다.
<빅 피쉬>는 미스터리물 형태의 진실을 찾아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을 거절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명시하지 않은 채, 이야기 속과 현실을 넘나드는 다소 번잡한 진행을 이룬다. 관객은 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펼쳐낸 팀 버튼의 세계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는 고민해야만 한다. 그러다가 윌이 수영장의 물풀을 걷다가 커다란 물고기를 보면서 아버지의 이야기와 현실의 접점을 찾아가자 추리소설의 결말처럼 이야기는 매끄럽게 마무리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팀 버튼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다시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버린다. 폭우 속을 달리던 에드워드의 자동차가 어느덧 물 속에 있고, 여인의 모습을 한 물고기가 그의 앞을 헤엄쳐간다. 이튿날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자동차와 옛 시절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것은 허풍의 필수 조건인 ‘정확히 꿰어맞추기’와 다를 바 없다. 즉 팀 버튼은 <빅 피쉬>를 이야기해나감에 있어 에드워드가 윌에게 들려주었던 것처럼 커다란 허풍 속에 자잘한 실재를 호두과자 속의 호두처럼 놓아 논 것이다.
<빅 피쉬>의 카메라는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초반 인물의 시점쇼트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양들의 침묵>에서 조디 포스터가 살인범의 지하 작업장을 다니던 쇼트처럼 종종 인물의 팔은 프레임의 좌우로 뻗쳐 나와 전방을 지향한다. 물 속에서 물고기가 뒤에서 앞으로 헤엄치는 오프닝 신에서부터 에드워드가 마녀집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신, 거인이 양을 잡아먹는 신, 에드워드가 뼈가 즐비한 거인의 굴을 찾아가는 신 등 영화의 초반 시점쇼트가 자주 보인다. 팀 버튼은 허풍과 환상 속으로 접근하는 영화의 초반부에 이러한 시점쇼트를 집중적으로 배치함으로 인해 관객이 에드워드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탄생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 윌이 아버지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꿈을 가진 자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정확한 시퀀스이다. 이미 윌은 냉정한 현실을 택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는 에드워드가 꿈꾸는 죽음의 상황을 이야기해준다. 병원을 박차고 나가 에드워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환영에 가까운 작별 인사를 받으며 물고기로 변해 떠나가는 장면은 중환자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자의 모습과 교차된다. 에드워드와 관련되어 펼쳐지던 앞의 이야기들이 철저히 사실처럼 포장된 허풍이었음에 반해, 이 시퀀스는 냉정한 물리적 죽음 앞에 있는 인물이 찬란한 심리적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윌의 이야기를 통해 에드워드의 허풍은 비로소 현실과 만나게 되고 완성을 이루는 셈이다.
에드워드의 일생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찾을 수 있는 것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평생을 꿈꾸며 살았고 또 그 꿈을 이루려 노력했으며 적어도 그것들을 이루었다고 여기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아내 산드라를 얻는 이야기는 여기에 가장 맞아 떨어진다.
서커스장에서 그녀를 본 에드워드는 첫 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서커스 단장의 말에 보수도 없이 서커스 팀에 합류한다. 사자의 입에 머리를 넣고, 질주하는 오토바이 사이에 서 있으며, 표창이 날아와도 사랑에 빠진 그는 두려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단장은 아주 작은 정보만을 넘겨준다. 그리고 그는 노예처럼 또 일을 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이란 인물 역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삼촌 라반 아래서 이십년을 봉사한다. 성경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인물로 표현되는 야곱은 실제로 자신이 얻고자 하는 무언가를 위해 모든 것을 걸어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에드워드 역시 이미 친구의 약혼녀인 산드라를 얻기 위해 노력과 온 몸을 바친다. 노란 수선화 위에서 그녀의 확답을 받은 그의 표정은 영화의 마지막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짓는 웃음과 그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건네는 얼굴과 정확히 겹쳐진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에 꼭 필요한 것은 사랑과 가정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팀 버튼이 내어놓은 어른 되는 과정에 대한 첫 번째 고백이다. 이제 세상에서 사라진 악동, 어른이 된 팀 버튼은 <빅 피쉬>를 통해 세상의 일을 풀어내는 데는 논리보다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가슴이 답답한 시대에 샘물처럼 다가오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세기 37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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