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단오풍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신윤복 <단오풍정>, 《혜원전신첩》’. (간송미술문화재단)
조선 시대의 르네상스라고 불렸던 18세기, 당시의 조선에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있었다. 두 천재 화가는 완전히 다른 화풍을 가졌고, 다른 소재를 택했지만, 그 중심이 사람이었다는 것이 같았다. 그로부터 약 100년가량이 흐른 뒤, 프랑스에는 후기 인상파라는 새로운 화풍이 떠올랐는데,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이었다. 두 사람은 훌륭한 그림 실력을 가졌다는 것과 더불어 안타까운 생을 살다가 갔다는 것도 닮아있는데, 이런 두 사람이 두 달간 함께 동거하면서 보낸 시간은 언쟁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18세기의 조선과 19세기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네 명의 예술가, 이들의 삶과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왼쪽부터) 김홍도 <서당>, <씨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미술오천년
PART 1. 화원의 모범생과 문제아-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진경의 시대, 화폭에 ‘삶’을 담기 시작하다
신윤복, <월하정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신윤복 <월하정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문화재단)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화풍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산수화를 그려도, 중국의 산수를 그리는 경향이 강했는데, 우리의 산천을 그린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의 진짜 경치를 그렸다고 해서 이를 ‘진경산수화’라고 불렀다. 우리 땅을 그리는 분위기가 시작되면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한 그림이 나타났다. 풍속화였다. 우리 산천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에도 자부심이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곳이든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풍경보단 사람들의 삶을 봐야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풍속화의 등장은 18세기 조선에 진정한 ‘진경’의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다.
(왼쪽부터) 김홍도 <춤추는 아이>, <우물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국립 중앙박물관/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미술오천년
이때 풍속화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두 사람이 바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다. 두 사람 모두 도화서의 화원 출신이었고 풍속화를 즐겨 그렸으나, ‘풍속화를 그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닮은 점이 없었다. ‘사람들이 삶’ 소재라 하더라도, 두 사람이 주목하는 삶은 달랐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화폭에 담아냈던 반면, 신윤복은 도시 부녀자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표현법도 달랐는데, 김홍도는 익살맞았고 신윤복은 섬세했으며, 김홍도는 색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신윤복은 화려한 색을 잘 활용했다. 김홍도가 담아낸 서민들의 삶이 조선의 낮에 해당한다면, 신윤복이 그린 것은 조선의 은밀한 밤의 풍경이었다. 너무 다른 두 사람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는 18세기 조선의 하루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윤복, <계변가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한국 데이터베이스 진흥원, ‘신윤복 <계변가화>’
‘삶’을 그렸지만, 그들의 ‘삶’은 남지 않았다.
(왼쪽부터) 김홍도 <벼타작>, <빨래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한국 데이터베이스 진흥원
조선의 낮을 그린 김홍도와 밤을 그린 신윤복, 그들은 조선의 하루를 화폭에 담아냈지만, 정작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기록이 많지 않다. 그들의 신분이 중인이었기 때문이다. 양반 남성 위주의 사회였던 조선 시대, 화원의 그림이 아닌 삶에 집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화원의 신분으로 삶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사람이 김홍도인데, 이것은 그가 정조의 신임을 받았었기 때문이며, 스승인 강세황이 유력한 사대부였기 때문이다. 강세황은 ‘단원기’에 김홍도가 어린 시절부터 그림 실력이 출중한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후원했다고 기록했다. 훌륭한 실력을 갖추었던 김홍도는 화원에 들어가서도 승승장구했다. 정조가 왕세손일 때 초상을 그렸던 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후 정조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했고, 수원화성 행차 시에는 전 과정을 김홍도의 주관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후에는 후원자를 잃고, 어려운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신윤복, <월하밀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신윤복 <월하정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문화재단)
김홍도의 기록도 자세한 편은 아닌데, 신윤복에 대해서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 역시 도화서의 화원이라는 것과 이름뿐이다. 기록이 거의 없는데, 그림은 범상치 않다. 신윤복이라는 인물을 두고, ‘어쩌면 여자일 수도 있다’, ‘김홍도와는 사제지간이었을 것이다’와 같은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확인할 방법은 없다. 신윤복은 김홍도와는 달리 도화서 생활도 길게 하지 못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가 궁에서 일하는 화원으로서는 부적절한 그림을 그려서 쫓겨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원을 그만두고 신윤복은 더욱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림을 그리려면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를 후원해주는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홍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신윤복은 이렇게 김홍도와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다른 관점으로 조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고, 그것이 그가 남긴 전부였다.
(왼쪽부터) 김홍도 <고누놀이>, <기와이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한국 데이터베이스 진흥원
PART 2. 불안정한 영혼을 화폭에- 반 고흐와 폴 고갱
후기 인상파의 시초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The Bridgeman Art Library, ‘별이 빛나는 밤’
1872년 모네의 <일출>이라는 작품이 인상파의 효시였다면,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1880년은 후기 인상파의 시작점이었다. 이는 고흐가 ‘후기 인상파’라는 새로운 화풍을 탄생시켰다는 말이다. 모네와 마네로 대표되는 전기 인상파의 특징이 빛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흐린 것이라면, 고흐로부터 시작된 후기 인상파는 형태 자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관점으로 사물을 담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기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하면, 전기 인상파는 여전히 회화적 요소가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술사에서는 현대 미술의 출발을 후기 인상파에서부터 잡는다.
폴 고갱, <누런 짚더미들 또는 금빛 수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누런 짚더미들 또는 금빛 수확’
고흐와 고갱이 후기 인상파라는 새로운 화풍을 탄생시켰으며, 그들의 작품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활동할 당시 받았던 평가가 아니었다. 고흐는 1880년부터 1890년까지 활동했는데, 후기 인상파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의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화가로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 특히 고흐는 생전에 그림을 딱 한 점밖에 팔지 못했다. 그런 그가 다작할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테오의 지원 덕분이었다. 테오는 고흐의 생활비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부대비용을 모두 부담하면서, 형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갱도 상황은 아주 다르지 않아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왼쪽부터) 빈센트 반 고흐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 <테오 반 고흐의 초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The Bridgeman Art Library/ 반 고흐 전시 본부
다른 방식으로 비참했던 두 예술가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고흐와 고갱은 두 달 동안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다. 고흐가 파리를 떠나 아를에서 생활하며 너무 외로워하자, 고흐의 동생 테오가 고갱과 함께 살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고갱은 고흐를 인간적으로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테오가 약속한 지원금 때문에 고흐가 있는 아를로 내려갔다. 그러나 두 예술가의 동거는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사사건건 부딪쳤고, 시도 때도 없이 언쟁했다. 어느 날은 몹시 격렬한 언쟁 끝에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자르는 사건까지 벌어졌는데,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자른 귀를 동네 매춘부에게 보냈다. 이 사건으로 고흐는 정신병자로 완전히 낙인 찍혔으며, 고갱은 아를을 떠나갔다. 원래도 불안정했던 고흐는 이후 정신병원을 드나들면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평생을 품고 있던 상실감을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겨누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The Bridgeman Art Library,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빈곤했기에 고흐와의 동거를 선택했던 고갱은 아를을 떠나며 더는 테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다시 빈곤한 생활로 돌아왔다. 이후 고갱은 원시에 대한 꿈을 품고, 파리에서의 생활을 정리해서 타히티로 갔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원시적 모습은 간데없고, 극심한 빈곤과 어설프게 들어온 문명에 물든 타히티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한다. 빈곤했던 고갱은 이상과 다른 타히티의 모습을 보고도 다시 파리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화가가 되기 전에는 번듯한 가정에, 풍족한 삶을 누렸던 고갱이었다. 전업 화가가 되면서 가정도 잃고, 재산도 잃은 고갱은 그림에 열정은 있었으나 방탕하게 살았고, 고흐보다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생활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타히티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죽기 2년 전에는 타히티에서의 생활비도 감당하지 못해서 히바오하 섬에 들어가 매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폴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타히티의 여인들’
작품 속에 남은 예술가의 지문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The Bridgeman Art Library/wikimedia commons
세상을 떠난 뒤 11년 뒤에야 고흐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깊은 상실감에 시달린 이유가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 고흐였고, 그의 작품은 끝을 알 수 없는 마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한 것이니만큼, 깊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삶을 버리고 완전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선 고갱도 마찬가지였다. 후기 인상파부터 형태가 왜곡되기 시작했는데, 고흐와 고갱이 후기 인상파의 시초임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일그러진 삶을 화폭에 담아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김홍도와 신윤복도, 어쩌면 그들이 그려낸 수많은 그림 속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록해 뒀을지도 모르겠다. 예술가의 작품에는 그들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가 담겨 있고, 그 대상을 향한 그들의 관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작품은, 그래서 모든 것이 자화상이다.
폴 고갱,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작품, wikimedia commons
'예 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12월 14일 오전 05:13 (0) | 2018.12.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