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턴 트럼보.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1954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무려 4300만명이 TV로 시청한 당시 최고의 볼거리였다. 버트 랭커스터, 데버러 커 주연의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작품상을 비롯한 주요 트로피들을 가져갔지만 그날 밤 스포트라이트는 흰 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는 아름다운 ‘앤 공주’ 오드리 헵번에게 쏟아졌다. 그가 출연했던 <로마의 휴일>은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 중 하나로 꼽히며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 영화가 됐다. 그런데 이날 시상식엔 관계자들은 물론 전 세계의 영화팬들도 깜빡 속아 넘어간 ‘방송사고’가 숨어 있었으니 바로 각본상을 받은 이안 메켈란 헌터가 <로마의 휴일>의 작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진짜 작가는 자신이 받았어야 할 오스카상과 자신이 말했어야 할 수상소감을 집에서 TV로 지켜보고 있었다. 돌턴 트럼보. 그는 이른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 ‘밥줄’이 끊긴 지 오래였고 <로마의 휴일>은 그가 생계를 위해 이름을 숨기고 쓴 대본 중 하나였던 것이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급성장한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자본과 제작사들의 착취와 횡포가 심화되자 이에 맞서 배우, 작가, 스태프 등이 노조를 결성하는 등 갈등 구도가 형성되고 있었다. 많은 영화인들이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던 와중 1947년 미 의회 반국가행위 조사위원회(HUAC)에 협조하지 않은 감독과 작가들이 미영화협회(MPAA)에서 제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돌턴 트럼보를 포함해 이 명단에 오른 10명의 감독과 작가를 ‘할리우드 텐’이라 부른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대 불어닥친 매카시즘의 광풍은 수많은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사상 검증을 강요했다. 블랙리스트의 명단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많은 영화인들이 공산주의자 혹은 동조자로 몰려 일자리를 잃게 된다.
2015년 개봉한 제이 로치 감독의 <트럼보>는 어쩌면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당했던 혹은 자행했던 부끄러운 과거, 블랙리스트에 대한 자기 성찰이었다. TV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로 늦깎이 스타가 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주인공 트럼보 역을 훌륭히 해냈다. 트럼보의 그림자 작가 이야기도 놀랍지만 미국인들이 끔찍하게 사랑하는 배우이자 반공주의자인 존 웨인이 영화에 일종의 ‘악역’으로 배치된 사실에 많은 관객들이 씁쓸해하기도 했다. 반면 트럼보를 도와 블랙리스트에 대항한 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2017년 지금도 생존해 당시의 일을 전하고 있으니 별들이 빛나는 방법도 제각각이다.(더글러스는 1916년생으로 100살을 훌쩍 넘어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영화 보다, 세상 보다]할리우드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와 매카시즘의 광기가 서서히 식어간 1960년대가 돼서야 트럼보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영화 크레디트에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로마의 휴일>이 트럼보의 작품이란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2003년 DVD판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이름은 영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사망하고 27년이 지난 2011년 비로소 공식적인 복권이 이뤄진다. 돌턴 트럼보는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그나마 그 재능 덕분에 이름을 숨기고 많은 시나리오를 써 가족을 굶기진 않았지만 많은 영화인들이 트럼보처럼 살아남는 데 실패하고 다시는 영화계에 돌아오지 못했다.
블랙리스트의 망령이 21세기에 다시 깨어났다. 문화예술인들에게서 표현의 자유를 빼앗고 자기 검열을 강요하면 건전한 사회, 문화융성 국가가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니 트럼보가 지하에서 탄식할 일이다.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의 이름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 역사의 ‘진짜 블랙리스트’가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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