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과 마산의 민중항쟁,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89]"박정희 처단하지 않으면 광화문 일대가 피바다로 변한다"
◈ 10월유신 선포 7주년 기념 만찬을 망가뜨린 부산 시위
유신이 선포된 지 7년만에 부산과 마산에 대규모 민중항쟁이 발생해 군이 출동했다. 이 시위는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사살하는 태풍을 불러 일으킨다. (사진=국무총리실 제공)
1979년 10월 17일 저녁 6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 선포 7주년을 자축하는 만찬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 이하 정부 여당의 실력자들이 모두 모여 흥청망청 놀고 있었다.
위키 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가수 현인, 백설희, 김정구가 무대에 나와 KBS 전속악단의 반주 속에 '신라의 달밤' 등 흘러간 옛노래를 불렀다.
같은 시간에 부산 도심에는 연 이틀째 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길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유신철폐'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전날 밤에는 파출소 11곳과 언론기관 한 곳이 불에 탔고, 17일에는 경남도청, 중부세무서, 경찰서 두 곳, 파출소 10 곳, 언론기관 세 곳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한편 청와대 만찬장에는 유정회 대변인 정재호가 대통령을 칭송하는 아부성 인사를 한 뒤 '삼각지 로타리에…', '나그네 설움', 묘하게도 '바보같은 사나이'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쯤 박정희 주변에 찬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라는 짜증 섞인 소리가 들려 나왔다.
분위기가 스산해지자 노래자랑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다들 끼리끼리 청와대 밖으로 흩어졌다.
유신정권은 서둘러 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부산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의 곤봉에 얻어맞는 동안에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 나갔다.
부산이 숨을 죽인 18일 오전 경남대학생과 마산대학생 수천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도심으로 진출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마산도 어둠이 깔리자 시민항쟁으로 번졌다.
마산 시위는 부산보다 더 격렬했다.
여당인 공화당의 당사가 부서졌고, 시내 여러 곳의 파출소가 습격당했다.
곳곳에서 박정희 사진이 떼어내져 짓밟혔다.
결국 유신정권은 20일 새벽 0시를 기해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이제 불길은 어디로 향할 지 아무도 몰랐다.
시민들의 비조직적인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 부산에 나타난 유신정권의 2인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군법회의장에서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의 거사가 대한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인 10월 18일 새벽 2시 부산의 계엄사령부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들어섰다.
그는 박찬극 부산지역계엄사령관에게 박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했다.
"데모의 징후가 여러 타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시켜라"
김재규의 부산 출장은 그와 박정희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최고 정보책임자인 김재규가 보고 듣고 판단한 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갈랐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온 김재규는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부마사태는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정책 불신,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입니다.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내려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을 시키겠느냐?"고 강변했다.
배석한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맞장구를 쳤다.
김재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차지철(맨 왼쪽)이 바라보는 가운데 박정희가 김계원 경호실장(왼쪽에서 두번째)에게 막걸리를 따라주고 있다. (사진=청와대출입사진기자단 제공)
10월 24일 신민당 황낙주 원내총무를 만난 자리에서 김재규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신문에선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김재규는 육사 2기 동기생으로 박정희를 만난 이래 그와 친형제처럼 지내 박정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재규는 이미 부산에서 4.19와 같은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는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유일한 방법은 박정희를 제거하는 것 밖에 없었다.
◈ 김재규와 부하들, 전광석화 같이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제거하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에서 김재규가 밧줄에 묶인 채 권총을 들고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왼쪽은 김계원 비서실장. (사진=보도사진연감 '80 제공)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55분, 청와대 인근에 있는 궁정동 안가.
이 곳은 박정희가 사적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여자들과 즐기기 위해 마련한 장소인데, 대통령 경호실 차장도 그런 곳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비밀에 싸인 곳이었다.
온돌방 등받이가 있는 노란색 방석에 대통령이 앉아 있고, 그 좌우에는 가수 심 양과 모델 신 양이 앉아 있었다.
맞은 편의 왼쪽에는 김재규가, 오른쪽에는 김계원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김재규 사이인 식탁 옆자리에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자리했다.
김재규가 갑자기 김계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형님~ 각하를 똑똑히 모시십시요"
그리고는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자식~"하면서 권총을 쐈다.
이어 일어나면서 대통령에게 한 발을 쏘았다.
첫 총탄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다.
두 번째 탄환은 대통령의 가슴을 관통했다.
차지철은 "경호원~ 경호원~"하고 외치며 화장실로 도망갔다.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버리고 도주한 것이다.
김재규는 달아나는 차지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발사되지 않자, 밖에 있던 의전과장 박선호의 총을 뺏아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는 차지철 배에 한 발을 쏜 다음 여자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대통령의 뒷머리에 다시 한 발을 쏘았다.
철통같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유신체제'의 주인공과 경호 책임자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김재규의 총이 불을 뿜은 시각에 식당 현관 앞의 대기실에서는 박선호가 경호원 안재송과 정인형을 사살했다.
같은 시각 주방에서는 경호원 김용섭과 박상범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여흥을 즐기기 위해 궁정동 안가를 방문한 대통령과 경호실장, 경호원 4명이 전원 총알세례를 받았다.
역사상 가장 짧고 가장 완벽했던 '쿠데타'였다.
◈ 후회없이 떠난 김재규와 부하들, 대한민국 정치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다
10.26 재판정에서 김재규(오른쪽 흰옷 입은 인물)가 부하인 박선호(왼쪽 포승줄에 묶인 인물)중앙정보부 의전과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11권 제공)
김재규와 그 부하들은 전광석화와 같이 대통령을 사살했지만 결국 체포돼 모두 처형됐다.
그러나 부하들은 김재규 부장의 충격적인 명령을 받고도 일사분란하게 명령을 이행했다.
재판정에서도, 처형장에서도 조금도 상관인 김재규를 원망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났다.
부하들을 인솔해 거사를 지휘한 박선호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장님은 모든 것을 뿌리치고 민주회복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졌다. 김부장이 각하께 전화로 보고할 때 옆에서 가끔 들었는데, 분명히 욕먹을 일인데도 국민의 입장에서 속이지 않고 보고하는 것을 몇 번 보고 느꼈다"
그는 또 김재규의 행동이 "사심이나 욕심보다 신념에 의한 행동"이라며,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피고인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이었던 박흥주는 "평소 부장의 인격이나 판단을 믿었고, 당시는 그것이 가장 적절한 지시인 것을 알고 순응했다"고 말했다.
이들 모두 당당한 태도를 보일 수 있던 것은 당시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거사 때문에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많은 정치범이 석방된데다 '민주회복'의 함성이 메아리 치던 '서울의 봄'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결정적 원인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 문제였다.
10·26사건 후 법정진술을 위해 육군본부에 도착한 모델 신재순씨. (사진=보도사진연감 '80 제공)
박정희의 지칠줄 모르는 엽색행각 때문에 김재규와 연회장소인 궁정동 안가를 관리하는 부하들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김재규는 상고이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대통령이 유락장소를 찾아오는 빈도는 적어도 월 10회 정도이고, 상대하는 여자는 주로 TV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에 종사하는 처녀들로 그 수는 적어도 200명
이 넘었다. 어떤 경우에는 임신까지 시켜서 임신중절로 욕을 본 여성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군병원의 현역 간호장교들과의 사이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박선호 의전과장도 수없이 찾아오는 대통령에게 여자를 붙여주는 '채홍사' 역할에 환멸을 느껴 여러 번 사표를 냈다고 한다.
김재규 부하들 입장에서 나라 일을 제치고 밤낮으로 여색과 술에 젖은 대통령과 국가를 위해 건강을 해쳐가면서 일하는 김재규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부장의 명이 떨어지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통령 일행에게 총을 난사한 것이다.
김재규의 거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전두환이 유신체제와 같은 '천황제 국가'를 이어 받고도 끝내 단임으로 끝낸 배경에는 '10.26'의 망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거사로 인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이나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 같은 종신집권은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 버렸다.
'정치 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패한 권력 검찰 (0) | 2017.01.04 |
---|---|
신직수가 점찍은 김기춘, JTBC '스모킹건'에 쓰러지나 [김당의 나까프 ⑥] '신(新) 김기춘뎐' (2) : '법비 신직수'가 키운 '법비' (0) | 2017.01.03 |
2015년 6월 28일 오후 12:21 (0) | 2015.06.28 |
2015년 6월 28일 오후 12:11 (0) | 2015.06.28 |
2015년 6월 28일 오후 12:00 (0) | 2015.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