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그 시커먼 속을 알고 싶다
‘귀하신 몸값’ 왜 자꾸 떨어지나… “달러 강세·공급 과잉·큰손 움직임”
천덕꾸러기 일꾼 젯 링크(제임스 딘)는 농장 주인 집에서 운좋게 작으마한 황무지 땅을 상속받는다. 땅을 도로 팔라는 권유를 물리친 그는 혼자서 땅에 철심을 박고 원유 시추 작업에 나선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원유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고 빚만 늘어나고 땅에서 쫓겨날 처지가 된다. 궁지에 몰린 어느 날, 마침내 시추한 땅에서 시커먼 원유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다. 그는 가난뱅이에서 순식간에 텍사스 제일의 석유재벌이 된다.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자이언트>는 제임스 딘의 고독한 눈빛 연기에 매료된 때문인지 오래도록 이미지가 선명하다. 여기엔 극적인 드라마도 한몫을 한 것 같다. 땅속에서 솟구친 시커멓고 물컹물컹한 것이 그토록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원천이라니. 1970~1980년대 숱하게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으니 전기든 뭐든 무조건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 원유가 고갈되면 큰일난다"는 말도 늘 따라다녔다. 한때는 해역 '제7광구'에서 원유가 나오면 한국도 산유국이 된다는 꿈이 부풀려지기도 했다.
최근 외신에는 '국제유가 폭락' 소식이 자주 등장한다.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배럴당 50달러 붕괴, 브렌트유와 두바이유도 50달러 붕괴…. 국제유가는 22일(현지시간) 미국의 지난주 원유 재고가 급증했다는 소식에 또 하락했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3월물 WTI 가격은 배럴당 46.31달러까지 떨어졌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북해산 브렌트유도 가격이 하락해 48달러 선에 거래가 형성됐다. 일부에서는 국제유가의 배럴당 40달러 붕괴는 물론 최악의 상황에서는 20~30달러까지 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고갈될 위험이 있는 그 '귀한 몸값'이 계속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국제유가를 좌우하는 유종은 WTI, 브렌트유, 두바이유 등 세 가지가 대표적이다. 일반인들에겐 낯설지만 고품질인 나이지리아의 보니 라이트(Bonny Light), 인도네시아의 미나스(Minas) 등 세계에는 100여가지의 유종이 있다. 이 중 특히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이뤄지는 WTI의 하루 선물 거래량은 5억~6억배럴로 단일 상품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유가 변동에 따른 차익을 추구하는 파생상품과 복잡하게 얽혀 있어 WTI 등의 가격 흐름은 국제 금융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중동지역에서의 수입 비중이 높아 두바이유 가격에 민감하지만 세 유종의 가격은 거의 같이 움직인다. 배럴당 적게는 1달러, 많게는 3~4달러의 가격차가 난다고 한다. 1배럴은 약 158.9ℓ이다.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원유로 가득 채운다면 약 1500만배럴이 든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한국의 원유 수입량은 9억1507만배럴이었다.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61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이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말부터 두드러진 국제유가 하락은 미 달러화 강세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지난해 상반기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 이라크 내전 조짐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미국 경기가 회복하면서 돈을 푸는 양적완화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달러가치가 높아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달러로 사고팔아야 하는 원유 등에 몰린 투기자금이 이탈하면서 원유에 대한 금융 수요가 위축된 것이다. 여기에 2012년부터 원유 생산량을 늘려온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정책도 한몫을 하고 있다. OPEC는 국제유가 하락세에도 생산 감축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이 생산하는 셰일오일의 공급과잉이 국제유가를 떨어트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원유의 몸값 안에는 정치, 경제 등 급변하는 세계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세계 원유시장의 '큰손'이 된 중국은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미국과 어깨를 겨눈다.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미국과 중국의 경기는 국제유가와 밀접하다. 2015년 국제유가는 어떻게 될까. 이충재 KT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공급과잉과 달러 강세 등으로 국제유가는 여전히 큰 폭의 하락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봤다. 한편에선 국제유가 하락이 글로벌 경기침체를 나타내고 있지만 값싼 유가를 바탕으로 세계 경기가 회복세를 띠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원유 가격에 숱한 질문과 답이 들어 있는 셈이다.
■ 석유 자원 고갈된다는 전망 맞나…"생산 정점 시기 이미 지나"
전성시대 이끄는 셰일오일 '또 다른 고래 기름'
에너지를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저유가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조만간 고갈될 것이라는 우려를 비웃듯 미국발 셰일가스·오일 붐은 석유 전성시대를 새로 이끌고 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리처드 뮬러 미국 UC버클리 교수는 "셰일가스와 셰일오일이 새로운 돌풍을 일으킬 에너지"라며 "태양이나 풍력에너지 등이 실용화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 연방정부의 과학기술자문단에서 활동했으며 저서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으로 유명하다. 뮬러 교수는 지난해 국내에도 출판된 <대통령을 위한 에너지강의>에서 셰일오일의 가능성을 낙관했다. 셰일오일은 미국에만 사우디아라비아 원유 매장량의 5배이다. 지난 200년간 미국이 사용한 양인 1조5000억배럴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셰일오일은 또 다른 고래 기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석유와 전기가 개발되기 이전에 고래 기름이 등잔, 양초, 등대, 가로등 불빛을 밝히는 재료로 사용된 '혁명적' 사건을 빗댄 말이다. 다만 "생산 과정에서 지구온난화 우려가 사실로 밝혀지면 잠재적인 재앙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구 자원의 미래가 대중이 생각하는 것만큼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주장도 있다. IHS 케임브리지에너지연구협회 회장이자 미국 에너지자문위원회 위원장인 대니얼 예긴은 <2030 에너지전쟁>에서 "요즘 원유 생산은 1957년에 비해 5배로 커졌고, 여전히 화석연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에너지 고갈에 대한 두려움은 19세기부터 쏟아졌지만 세계에 매장된 원유량 추정치는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준다"며 "결론적으로 석유가 고갈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반면 석유는 한정된 자원이고, 석유로 대표되는 '에너지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반론이 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석유 '고갈 시점'보다 '정점 시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석유는 유한 자원인 만큼 고갈 시점 훨씬 전부터 생산 정점 시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생산량이 줄어도 수요 패턴은 쉽게 변하지 않아 석유 가격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보수적으로 에너지 전망을 하는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통 석유는 2006년과 2010년 사이에 생산 정점을 찍었다고 분석했다.
연구소는 현재 저유가를 유지하는 셰일가스나 오일과 같은 비전통 자원도 '기후변화'와 '에너지 고갈'이라는 이중의 위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강준 연구기획위원 등은 <착한 에너지 나쁜 에너지 다른 에너지>에서 "로버트 호워드 미국 코넬대 교수는 셰일가스 채굴·운송·저장·정제 과정까지 포함할 경우 온난화 효과가 석탄보다 더 높다고 한다"며 "세계가 소비를 지금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전제를 버리지 못하고 에너지 고갈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원자력발전소가 화력발전소의 대안은 될 수 없다는 게 독일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독일 생태연구소(에코인스티튜트)는 2011년 보고서에서 원전이 세계 1차 에너지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에 불과하고, 기후 보호에 기여하려면 전 세계 원전을 현재 430여기에서 1000~1500기로 늘려야 한다고 밝혔다. 원전이 화력발전소보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핵에너지가 기후변화의 '해결책'이 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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