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비리

2015년 6월 28일 오전 11:47

tiger471 2015. 6. 28. 11:59

전쟁통에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 왜 서로 죽고 죽였나?

[임기상의 역사산책 97] 전선을 따라 마을로 내려간 '집단학살'


지금은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지로 변한 낙화암 고란사. 6.25전쟁 직후 이 곳에서 수많은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됐다.

1950년 7월 14일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자 충남 부여군의 경찰은 수십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고란사로 끌고가 총을 난사했다.

“탕~탕~탕~탕”

경찰은 처형된 이들의 시신을 백마강으로 던졌다. 시신은 강물에 떠내려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때 좌익세력이 세다는 A마을에서 끌려가 처형된 청년은 강순모, 강진모, 강윤모, 김순모 등 모두 4사람이었다. 최재원도 끌려갔지만 요행히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다 마찬가지지만 보도연맹원의 집단처형은 연쇄적인 보복을 불러 일으키는 시발점이었다. 며칠 후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오자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B마을의 이장 조동갑 때문에 끌려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어머니들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그를 붙잡아 인민재판에 회부한 후 뭇매를 가해 살해했다. 이어 경찰 끄나풀이라는 이유로 B마을에 사는 조동을을 처형했다. 그는 산채로 냇가에 머리만 내놓고 매장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두 사건은 A마을과 B마을 사이에 깊은 원한을 만들었다. 이것도 모자라 A마을의 일부 주민들은 처형된 두 사람의 집에 가서 재산을 약탈까지 했다고 한다. A마을 주민들 중 이런 일에 앞장선 인물은 머슴이나 빈농층이었다고 한다.

인민군의 부여 점령 기간은 석 달이 채 안되었다.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인민군이 부여에서 철수하자, 제일 먼저 경찰이 마을에 들어왔다. 경찰은 A마을을 ‘빨갱이 마을’로 지목하고 이웃한 B마을 사람들과 함께 A마을을 포위하고 성인 남녀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리고는 경찰지서 밑 굴 속에 감금했다.

잡혀간 이들은 부역 혐의에 대해 일일이 조사를 받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경찰서에서 먼저 풀려 나와 집에 돌아온 이들은 자신들의 집에 있던 가재도구 가운데 쓸만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했다. B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에 와서 가재도구, 가축, 농기구, 정미기계 등을 모두 가져가버린 것이다.

A마을의 장로격이었던 강진구는 금강변으로 끌려가 머리만 내놓고 백사장에 파묻히는 수모를 겪었다. 죄목은 마을 청년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동을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 이어 B마을 사람들은 A마을의 중앙에 있던 고목인 팽나무와 느릅나무를 베어버렸다. 이 나무들은 A마을의 상징이었다. 학생들도 학생연맹에 불려가 많이 얻어 맞으면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이런 상황이 호전된 것은 1.4후퇴 때였다. UN군이 북진하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면 후퇴하자 A마을에 대한 주변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때까지 경찰지서의 굴에 갇혀 있던 주민들도 풀려나고, 수배된 주민들도 자수하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았다. 다들 세상이 몇 차례 뒤집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지나친 행동은 서로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 ‘국민보도연맹사건’...서로 죽고 죽이는 악순환의 시작


1951년 2월 전남 담양에서 부역 혐의자들이 면사무소 창고에 수용되어 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없었다.

“1950년 6월 말 강영애는 새벽녘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게 손이 묶인 채 청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의 국민보도연맹원이었던 그녀는 10여일 정도 유치장에 구금돼 있다가 7월 10일 저녁 무렵, 경찰 트럭에 실려 남일면 쌍수리 야산으로 끌려갔다. 경찰은 트럭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내려오자마자 이들을 꿇어 앉혀 놓고 총을 쏘았다. 강영애는 온 몸에 8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살아 남았다. 같이 있던 남편은 ‘이렇게 같이 죽게 된 것도 다행’이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죽었다.”

1949년 4월 20일 한때 좌익단체에 가입했던 국민들의 사상전향을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됐다. 사상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이 조직은 모집과 관리는 일선 경찰서에서 맡았으며, 대부분 요시찰인으로 주요 감시대상이었다. 회원은 시골로 갈수록 사상이나 이념에 무관한 촌사람들로 할당에 의해 채워졌다.

김원일의 장편소설 ‘불의 제전’의 한 장면을 읽어보자.

“지서 순경이 과거 전력이 있는 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 회원, 자주통일청년단 회원, 서북청년단원을 앞장세워 리마다 일정한 할당을 주었다. 해방 초기 좌.우익이 뭔지도 모른 채 민족해방에 들떠 권유하는대로 아무 단체나 가입했던 경험이 있는 농민들로, 당신 전력에 문제가 있다며 윽박지르면 지레 겁을 먹고 손도장을 찍었다. 해방 직후 조국 건설에 따른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주최 교양 강좌 등에 몇 차례 참석했건, 남한 전역을 휩쓴 ‘추수 봉기’ 행진에 줄을 섰어도, 당신이 과거 그런 일 했지 않았냐는 넘겨짚기에 놀라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 20만 명에 달하는 국민보도연맹원이 전쟁이 터지자 가장 먼저 ‘내부의 적’으로 간주돼 대부분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죽은 이들의 유가족들은 인민군이 내려오자 보복에 나서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자 역보복이 시작되면서 이 땅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런 비극은 남한 땅 어느 시골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에 위치한 합덕성당. 현 성당 건물은 1929년 준공된 것으로 한국전쟁 때 제7대 페랭 신부가 처형당한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남 당진군 합덕면은 호남평야, 김제평야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넓은 예당평야의 가장 넓은 지역인 소들강문평야에 자리잡고 있다. 1920년대만해도 이미 경지면적은 1,400여 정보에 달했다. 이 땅을 갖고 있는 지주들은 조선왕실의 여러 궁방과 한양에 거주하던 양반과 관료들이었다. 지주들은 대부분 서울을 비롯한 외지에 살던 부재지주였다. 100필지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대지주는 천주교회를 비롯해 윤한선, 이근영, 김정환, 김규순, 이범승, 임호상 등이다.

이 가운데 두 사람이 눈에 띤다. 점원리에 124필지를 갖고 있는 윤한선은 친일파를 7명이나 배출한 윤치호 가문의 일원으로 훗날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의 동생이다. 해평 윤씨 가문은 아산군 신평면 둔포리에 대규모 농장과 저택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서 멀지 않은 점원리에서도 토지를 계속 사들인 것으로 보인다. 신흥리와 도리에 100필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범승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조선총독부 농무과 사무관, 황해도 산업과장 등을 지냈으며, 해방 직후 미군정의 초대 서울시장에 올라선다.

대지주 가운데 가장 많은 땅을 갖고 있는 곳은 천주교회였다. 천주교회는 모두 195정보의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대부분 합덕면에 있었다. 여기 합덕면의 소작인들은 일제시대부터 폭우와 가뭄은 물론 지주와 마름의 수탈에 시달렸다. 비싼 소작료도 그렇지만 툭하면 소작권을 다른 농가에 주겠다는 협박에 시달렸다. 합덕성당과 이 동네에 사는 재지지주 박준기-박병렬 일가 등은 소작인들에게 관대하게 대했지만, 주로 서울에 사는 부재지주와 그를 대행하는 마름의 횡포는 극심했다. 이같은 착취와 불만이 6.25전쟁이 발발하자 좌우익 간의 계급투쟁으로 터지고 만다.


지금도 풍요로운 소들강문평야. 이 땅을 두고 6.25전쟁 중에 지주계급과 소작인 간에 골육상쟁의 비극이 벌어진다.

전쟁 중에 당진에서 가장 많은 주민들이 죽은 곳은 합덕면이다. 우익 쪽에서 250명, 좌익 쪽에서 400명 정도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골마을에서 대학살이 벌어진 첫 불씨도 역시 보도연맹사건이었다.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처형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보복극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950년 9월 말 인민군이 철수하자 지방 좌익들은 이미 체포한 우익 인사외에도 숨어 있는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러 다녔다고 한다. 체포된 이들은 합덕초등학교 뒤쪽의 읍박골로 끌려가 모두 36명이 처형되고 시신은 구덩이 2개에 나눠 묻혔다. 지방 좌익마저 철수하자 우익 청년들은 치안대를 조직해 각 마을마다 부역자들을 색출했다. 또다시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합덕성당도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페랭 신부와 신도회장, 복사, 수녀까지 내무서에 끌려가 처형되었다. 특이한 인물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재지지주였던 박준기-박병렬 집안이다. 9월 29일 밤 좌익 세력이 이 집을 습격했다. 이들은 죽창을 들고 쳐들어왔는데 박씨 집안은 동네 주민들과 함께 집에 있던 엽총을 쏘아 막았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이 집안을 보호한 것은 박씨가가 오랜 기간에 마을주민들에게 베푼 공덕 때문이었다. 지역사회에서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였다. 살아남은 주민들이 바라본 마을 내부의 학살에 대해 들어보자.

금산 양곡리의 송OO씨.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의 밀정 노릇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해방 이후 마을 사람들로부터 보복을 당했다. 그리고 전쟁 때 다시 그에 대한 보복을 저질렀다. 당시 좌우익은 이념이 아닌 감정에 의해 갈라진 것이었다."

금산 불이리의 길OO씨.

“전쟁기에 인민군은 머슴과 산지기들에게 감투를 씌워 그들을 이용했다. 불이리에 왜정 때 머슴이 있는 집은 다섯 집 정도였다. 이들 머슴들은 노비가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각 마을에는 몇 집의 지주가 있었고, 80~90%는 소작농들이었다. 대부분 고구마 농사를 지어 식용으로 삼았다. 산지기는 외지에서 온 노비 출신들이 많았다.”

이 증언을 들어보면 전쟁 중에 드러난 좌우익의 갈등과 보복은 사실은 감정에 의한 것이 많았다는 얘기다. 즉, 평소의 인간관계가 상호 보복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인민군이 머슴이나 노비 출신 산지기를 이용한 것은 항상 억눌려온 하층민들의 감정을 이용했다고 봐야 한다. 결국 머슴과 산지기도 권력에 이용당한 존재들이었다. 정리해보면, 마을에서 덕을 베풀거나 하층민을 함부로 하대하지 않은 지주나 좌익인사들은 전쟁통에 많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악덕지주나 권력을 갖고 주민들을 착취하던 인물들은 하층민들로부터 보복을 당했다. 이 사적인 린치는 다시 세상이 바뀌면서 역보복을 당해 이런 마을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옥으로 바뀌었다.

◇ 6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2002년 2월 6일 전남 진도군 의신면 갈매기섬에서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씻김굿이 열렸다.

전국을 다니며 많은 증언을 듣고 <마을로 간 한국전쟁>이라는 역저를 출간한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현지조사 중에 겪은 일화를 기술했다.

“한 마을의 노인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전쟁 때 있었던 일에 대해 묻자, 표정이 험악해지면서 대뜸 ‘당신 어디에서 나왔소?’, '당장 내 집에서 나가시오‘라고 외쳤다. 결국 나는 그 집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한 마을의 노인은 자신이 중학교 때 겪은 전쟁 경험을 들려주면서, 경찰이 들어온 이후 부역자들을 잡아다가 가뒀던 창고 자리와 그들이 처형되어 묻힌 곳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안내한 곳에는 개인 묘보다는 다소 큰 봉분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 수십 명의 부역자들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 세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9.28 서울수복 이후 가족들이 시신을 모두 찾아가 다른 곳에 묻었지만, 인민군에 부역한 이들의 시신은 경찰의 눈이 무서워 아무도 찾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 마을에서 부역자 가족들에 대한 ‘마을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부역자 가족의 처리 문제는 마을로서는 매우 골치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추방’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추방당한 이들 가운데 조상들의 뼈가 묻어있는 마을로 돌아오려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이들을 절대 받아주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의 강경한 태도는 최근 들어 다소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접근금지령’이 계속되고 있는 마을도 많았다.”

박찬승 교수는 이같은 비극의 원인에 대해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

“전쟁 이전에 한국 사회는 갈등 요소가 대단히 많은 사회였다. 예를 들면 신분제, 지주제, 씨족 간의 갈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한국전쟁기에 격렬한 충돌과 반복적인 학살로 나타났다. 어느 사회든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갈등을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미숙했고, 그 결과가 엄청난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65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서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남북 간의 갈등, 남한 내 각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얼마나 현명하게 풀어가고 있나? 한국 사회는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기보다는 여전히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데 익숙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