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5일 오전 11:27
명량 해전
명량대첩
(정유재란의 일부)
회본태합기에 수록된 명량 해전도
날짜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장소
명량해협(울돌목)
결과
조선 수군의 대승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과 수륙병진 좌절
교전국
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
조선 왕국
Toyotomi mon.png
쇼쿠호 일본
지휘관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권준
무의공 이순신
김억추 전라우수사
김응함 미조항 첨사
안위 거제현령
조계종 영등포만호
배흥립 조방장
정응두 평산포대장
도도 다카토라 총 사령관
모리 다카마사 군감
구키 요시타카
구루시마 미치후사† 선봉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나카가와 히데나리
하치스카 이에마사
가토 요시아키
하타 노부토키†
병력
판옥선 13척, 협선 32척 전투에 임한 함선 (세키부네 등) 133척, 전투에 임하지 않은 기타 함선 200여척
피해 규모
전선 피해 없음, 전사자 및 부상자 4명 혹은 73명 전선 30여척 혹은 120여척 침몰, 사망병력 2,600여명 내지 18,466명)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명량 대첩(鳴梁大捷) 또는 명량 해전(鳴梁海戰)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함선은 333척)을 물리친 조선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1]
목차
1 배경 1.1 조선 수군의 재건
1.2 일본 수군의 기동
1.3 울돌목에서의 접전
2 경과 2.1 승리의 요인
3 결과
4 기타 4.1 철쇄 사용설 및 명량해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
4.2 마다시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4.3 오익창의 사호집
4.4 명량대첩기념비
5 같이 보기
6 주석
배경
조선 수군의 재건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권시키는 대신 품계를 내려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순신이 파직당할 당시 그의 계급은 대감급인 정헌대부 정2품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하기는 하였으나 정3품의 계급으로 부여했다.
당시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미 계급 인플레가 심했다. 수군 수사의 기준 품계인 정3품을 가진 장수들이 넘쳐났다. 계급이 같은데 보직만 다른 상황이 일어났고 이순신이 통제영을 장악했던 세월이 길었고 그의 영향력이 미쳤기에 그나마 군이 통제가 되었지만 각 장수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상당한 충돌을 일으켰다. 명량해전이 끝나자 마자 교체되어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에나 다시 전라우수사가 될 수 있었다. 난중일기에도 "만호"에나 어울릴 놈이라는 평가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의 휘하장수였던 충청수사 권준과 무의공 이순신을 수도방위를 이유로 전투참가를 불허하였다.
이처럼 조선 수군은 지휘 체계의 엉망으로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작부터 불안한 출발을 하였다. 더욱이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 (그러나 1척은 매우 파손되어 쓸 수 없었음. 실제 전투에는 12척이 임했다.)
칠천량의 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쳤다.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현재 해남군 어란리 근처)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겼다.
일본 수군의 기동
이 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지휘하는 333 척의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로 조류는 국내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빠른 수로를 이용하여 잔존하는 조선 수군을 격파한 후 일본 육군과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3척의 전선만으로는 무력하리라는 것이 일본 수군의 판단이었다. 이순신과 전투에서 이미 패배를 경험한 도도 다카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칠천량 전투의 승리가 일본 수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이었다.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의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이순신도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명량대첩 직전 날인 음력 9월 15일,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거듭 말하며,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2]
울돌목에서의 접전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실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았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류가 흘렸다. 울돌목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게 되는 것이다.[3]
조선 수군은 이 울돌목에서 결전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작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5Km 떨어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15일간이나 일본 수군을 유인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수군 역시 그런 급류에는 이미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런 급류를 타고 수가 적은 조선 수군을 단숨에 제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시코쿠(四國)의 미야쿠보 지역도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 않다고 한다. 특히 구루시마 수군은 원래 해적 출신으로 이 지역을 근거로 했던 바, 빠른 물살에 익숙한 이들은 명량해협에서 무리없이 전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경과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파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긴 이튿날인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333여 척이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대형 군선인 아타케부네가 협수로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고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 133척으로 진영을 짜고 협수로를 통과,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조선 수군 12척의 전선도 해협으로 들어서서 일본 수군을 맞이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 수군 일부가 적의 기세에 밀려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고,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대략 1킬로미터 정도 물러나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했다. 특히,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대포와 화살에 맞아 일본군들 일부가 바다에 빠졌는데 이 광경을 보고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구루시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오후가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조선 수군은 포격전과 충파를 거듭했고, 일본 수군은 조류의 역조(逆潮)와 조선 수군의 포격과 충파로 인해 전혀 반격할 수 없었으며, 또한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이 전투의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을 당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 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부터, 일본 본대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333척의 대함대를 12척으로 추격하는 형세가 되었고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
승리의 요인
조선 수군의 승리의 요인으로는 먼저 전함과 함포를 들 수 있다.
일본군 전함은 첨저선으로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타케부네(安宅船)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컸다.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왜선의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와 배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되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 충각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부서뜨리는 돌격전법도 자주 구사했던 것도 이러한 배의 특성 덕분이었다.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조선 수군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으며, 오늘날 다연장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 신무기도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일본 수군 역시 함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렀으며 일본 수군의 함포 적재량이 조선 수군에 비해 열세였다.[4]
또한,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병사들의 사기도 주된 승리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에 힘입어 조선 수군은 불리한 여건에서도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결과
유시(酉時 오후5시~7시)무렵, 전투는 끝났다.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함 130여 척 중 30여 척(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6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18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5]반면, 조선군의 전함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다만, 순천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6]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고여덟명이 물에 빠져 죽은 것[7]과 조선군의 전함이 총 13척이었던 것으로 볼 때, 전사자는 많아야 100명이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 대패로 인해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음력 8월 15일,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기타
철쇄 사용설 및 명량해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
일설에 의하면 이순신이 철쇄(쇠사슬)를 전투에 사용했다고 하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 예로, 《KBS 역사스페셜팀》은 철쇄를 사용한 명량 해전을 재현한 바 있다.
수중 철쇄(쇠사슬)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그러나 명량 해전의 전투 위치와 철쇄 사용 문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다음은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담당 이민웅 교수(해군 중령)의 주장이다.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난중일기》 음력 9월 16일자를 제시한다. 그 부분을 보면 “왜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또,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쇠사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 해전에서 쇠사슬은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기록은 과장이 많아,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철쇄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근거로써 쓰인다.
즉, 이민웅 교수는 철쇄 사용설을 일축한다. 또,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는 이민웅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순신역사연구회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여, 명량해전이 정설대로 울돌목에서 치러졌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그러한 이순신역사연구회의 반론을 보여주는 책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한 부분이다.[8]
우선 우수영 앞바다는 조류의 흐름과 무관하며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때문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도 왜군들은 물러가지 않고 조선 함대가 궤멸될 때까지 계속 공격해 올 것이다. 또 <지도 5-1-2>(옮긴이 주 : 우수영 앞바다에서의 전투모습)와 같은 진법으로 대치하고 있었다면 마다시의 죽음과 관계없이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다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선단들도 총력 공세를 폈을 것인바, 왜군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전멸시켰듯이 13척의 이순신 함대를 전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도대교 아래에서 마다시를 죽였고 마다시 선단을 대신해서 공격을 시도코자 했던 도도 다카도라 등 뒤따르고 있던 왜선단은 패전한 마다시의 선단이 불이 붙은 채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떠내려 오고 있었기에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위에 역류가 된 물살은 더욱 급류로 변해 갔기에 이순신 함대에 접근해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정리해 볼 때 필자들은 <지도5-1-2>에 동의할 수가 없다.
마다시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난중일기》에는 마다시(馬多時)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로, 일본의 해적 가문 출신이다. 당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함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오익창의 사호집
2012년 9월, 이순신의 부하였던 오익창의 사호집이 발굴되었다. 자료에는 "이순신 장군을 힘을 모아 돕는다면 살 것이요, 죽더라도 나라에 충성했다는 명분은 남을 것이다." 등에 피난길에 나선 사대부들을 설득해 식량과 옷을 조달하게 한 것도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며,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의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 탄환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 사호집을 완역한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다른 부하들의 문집보다 사호공의 문집이 더 구체적이고 상세해서 12척의 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9]
명량대첩기념비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명량대첩기념비가 있다. 1688년(숙종 14년)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다.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다.
♠ http://blog.daum.net/segon53/
이순신장군등 임진왜란및명량해전 정보 클릭
같이 보기[편집]
명량해협
임진왜란
이순신
주석[편집]
1. 사실 명량해전은 현재 역사 고증을 놓고 논란을 품고 있는 해전이기도 하다. 학계에서는 명량 해전에 대한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고 있고 아직 전쟁 전개 과정이 미궁에 빠져있다.
2.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난중일기”
3. 울돌목(명량해협)에는 현재 진도대교가 건설되어 있다.
4. 임진왜란 일본수군도 함포를 사용하였다
5.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4”, p.294, 2006.
6.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p.310, 2012.
7.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난중일기”
8.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4”, p.317~318
9. 명량해전 대승의 비결은?‥사대부 희생 빛나 mbc뉴스 2012년 9월 19일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 사이트에 객관적 흔적의 역사가 설명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