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9일 오전 09:30
알렉산더 대왕의 나라-
마케도니아 스코프예(Skopje)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프예(스코페- Skopje)는
'스코프예 2014 프로젝트' 일환으로 많은 동상, 건축물들을 신축중에 있어 어수선하였다.
화려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시절의 건축물들과 많은 업적을 이룬 위인들의 동상을 건립해,
그 시절을 극대화 해 되살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프예의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인상 싶다.
영화도 간데없고 인걸도 간데 없었다.
서로의 이해타산적인 이웃 간 각국의 전쟁으로 인한 영욕의 부침과
1963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건축물도 파괴되고 산천도 의구하지 않아 보였다.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과 현대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다른 민족과 체제이다.
현대 마케도니아는 슬라브족으로 구성되었고, 고대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나라가 아닌가?
현재 마케도니아는 슬라브 족의 문화가 주류이나 정교회의 내부 건축과
예배양식은 그리스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 그리스, 오스만투르크,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소아시아까지
파죽지세로 몰았던 수많은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세웠던 힘은 다
어디로 가고, 민족조차 달라진 콩조각 만한 이름만 남은 나라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곳 시민들의 모습에 애처롭고 처연한
생각마저 들었다.
알렉산더 대왕과 인류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를 낳은 나라 마케도니아는 위대한 나라였다.
키릴문자를 다듬고 완성한 것도 마케도니아의 큰 자랑이다.
그간 나에겐
사실 그 큰 족적을 남긴 알렉산더 대왕, 마더 테레사가 어디서
태어났다던가 하는 것은 극히 관념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고,
별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 곳을 가보기 전에는...
세계를 정복하려했던 알렉산드로스!!
그는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그의 부왕인 아버지, 필리포스 2세(Philippos 11)는 고대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 궁정에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해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윤리학, 철학, 정치학, 문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3년간 공부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원정(遠征) 때도 호메로스의 詩를 애독하고
그의 시에 등장하는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버지, 필리포스 2세에게서는 전술, 행정 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워
'냉철한 실리주의'를, 어머니 올림피아스에게서는 '격정적 신비주의'를 물려받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로만
알려져 있으나 그는 마케도니아가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었다.
아들보다 앞서 그리스를 재패하고 동방 원정 계획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필리포스 2세는 공인으로서는 이처럼 평탄해 보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장군이며 친척인 아타로스의 질녀(조카딸)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왕비 올림피아스도 그러했지만 그는 성격이 강한 여자를 좋아했다.
이 젊은 애인 또한 야심만만하고 자존심 강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필리포스 2세에게 왕비와 헤어지라고 간청했다.
알렉산드로스를 비롯해 주위의 충고를 무시하고 필리포스 2세는
이 여인이 제시한 조건대로 올림피아스와 정식으로 헤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새 왕비의 아들 알리다이오스 외에도 알렉산드로스 앞에
왕위를 둘러싼 경쟁자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필리포스 2세의 형 페르디카스 왕의 아들 아민타스와
새 왕비의 아들 카라노스가 왕위 계승을 놓고 겨루었다.
기원전 336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필리포스 2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한다.
그의 부왕, 필리포스 2세가 죽자
그는 약관 스무살의 나이에 마케도니아 왕(재위 BC 336∼BC 323)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되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파죽지세로 내달려 건설하였다.
그의 부왕 필리포스 2세 이상의 활약이었고 업적이었다.
부왕인 아버지가 닦아놓은 기틀을 그는 십분 활용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페르시아 정복을 그토록 원했던 것을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여세를 몰아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까지 침략하게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업적은 매우 큰 것이었고, 그가 정복한 땅에
수많은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다.
'헬레니즘'이란 말은 넓게 그리스 정신과 문화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역사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때부터 로마가 지중해 주변
세계를 통일하기까지 약 300년 동안의 세월을 가리킨다.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업적도 매우 크고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까지 인류가 활용하고 생활에 깊숙이
파고든 헬레니즘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왕립연구소와 큰 도서관 등이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 학자들이 초빙을 받아 연구에 몰두하였다.
고전을 연구하는 학문도 활발했으나, 특히 연구 실적이 뛰어났던
것은 자연과학 분야였다.
현대인이 활용하고 아직도 생활에 영향을 미친 2300여 년 전의
문화야말로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산드로 대왕이 정복한 고대 도시들-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 도달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야망으로 가득했으며, 곧 아라비아를 침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 메디우스와 함께 오랫동안 연회를 즐기며 만취했던 끝에,
그는 앓아누웠다. 6월쯤이었다.
그는 이미 열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약 2주가량 열병을 앓은 끝에 알렉산드로스는 사망했다.
왕위를 계승한지 13년 째인 고작 32세의 나이였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여러 문헌으로 보아 그는 말라리아를 앓고 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강하고 힘센 대왕이 결국 모기 한 마리에?...
그 때는 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부하 장군들 사이에 세력다툼이 벌어져
광대한 영토는 갈래갈래 갈라지게 되었다.
그중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등 세 왕국의 세력이 컸다.
그 후, 번영의 중심은 오리엔트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중에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 도시로서
여러 가지 상품이 집산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없는 것은 눈(雪)뿐이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알렉산드로 대왕이 정복한 고대 도시들을 현대 국가에 표시-
아르키메데스(전 287경~212)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학문을 연구한 후 시라쿠사로 돌아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왕에게서 금세공업자가 만든 왕관이
순금인지 감정하라는 명을 받은 이야기도 이 무렵의 이야기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미술 분야에도 새로운 특색이 나타났다.
그 시대뿐 아니라 그리스 미술 중 첫째로 손꼽히는 걸작으로 알려진 것은
멜로스 섬에서 발견된 아프로디테, 곧 '미로의 비너스'란 대리석상이다.
마케도니아 스코프예(Skopje)
마케도니아-
정교 66%, 회교 33%, 기타.. 1인당 GDP 5,073$.
면적- 한반도의 1/8(강원도의 1/2정도)
인구- 200만여 명.(참고-대구:250만여 명)
그 옛날 영화는 다 어디로 갔는가?
1995년 9월에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국명을 '구(舊)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 the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으로
하라는 1993년 UN 중재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두 나라의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다.
이때 이후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마케도니아는 경제적 어려움, 알바니아
소수민족과의 갈등 등으로 현재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발칸반도 8개국 여행 사진
바르다르강 위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해주는 15세기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Stone Bridge)-
다리 이쪽은 신시가지, 저쪽은 구시가지로 확연히 다르다.
'스코프예 2014 프로젝트'-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프예는 '스코프예 2014 프로젝트' 일환으로 많은 동상,
건물들을 신축중에 있어 어수선하다.
스코프예 공항과 스코프예를 관통하는 고속도로에도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모든 동상들은 알렉산드로스 기마상을 향한 방향으로 세웠다고 한다.
스코프예 신시가지 중앙광장에 선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마상-
그는 약관 스무살의 나이에 마케도니아 왕(재위 BC 336∼BC 323)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되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파죽지세로 내달려 침략하여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차례로 세웠다.
그의 부왕 필리포스 2세 이상의 활약이었고 업적이었다.
마케도니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스코프예 2014 프로젝트' 의
중심인 기마상으로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마상이다.
마케도니아 독립 20주년에 맞춰 2011년 9월 8일에 건립을 완성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마상-
알렉산드로스가 소아시아 원정 중이었다.
고르디움이라는 도시에 군대를 결집시켰을 때의 일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도시의 제우스 신전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는데,
이 신전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으로 유명한 '농부의 수레'를 받들어 모시고 있었다.
그 수레의 채에 박힌 나무못에는 나나카마드라는 나무껍질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고
'그것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세계의 왕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매듭을 푸는 데 도전하기로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칼을 빼 그것을 내리쳤다.
그는 기존의 원칙을 깨고 매듭을 풀어 '세계를 손에 넣을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동방을 제패한 영웅 (제왕열기)-
스코프예 신시가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일화-
그는 위풍당당하게 그리스로 남하하여 코린트에 입성했다.
이곳에서 그는 퀴닉학파의 거두인 디오게네스(Diogenes)를 만날 참이었다.
당시 80세에 가까웠던 디오게네스는 세속적인 가치를 경멸하며 거지 모습을 한 채
통 속에서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유명한 철학자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가 찾아갔을 때 늙은이는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알렉산드로스 왕이다. 당신의 소원을 말하라.
무엇이든 내가 그대를 위하여 해 줄 것은 없는가?"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그렇다면 내가 햇볕을 쬘 수 있도록 비켜 주시오"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철학자의 모습이
부럽기만 하였다.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 하였다.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대왕은
아무 곳에도 아부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을 거기서 보았던 것이다.
신시가지 길거리에 서 있
고체 델체브 상(Goce Delcev Statue)-
1878년 오스만제국이 러시아에 패한 이후 마케도니아를 러시아에 넘겨주기로 되어있었으나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마케도니아를 러시아의 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그 과정에서 봉기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한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2010년 5월에 세워진 동상.
고체 델체브 상(Goce Delcev Statue)-
이 동상과 뒤로 마주 보이는 신축 중인 건물, '고고학 박물관' 사이로
바르다르강이 흐르고 있다.
담 그루에프 기마상(Dame Gruev Statue)-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에서 활약한 혁명가.
스코프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르는 바르다르강-
바르다르강 위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해주는 15세기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Stone Bridge)가 놓여 있다.
2016년 완공 예정인 '마케도니아 고고학 박물관'이 마주 보인다.
역시 '스코프예 2014년 프로젝트' 일환으로 건축 중에 있다.
이 건물이 완공이 되면 스코프예를 대표하는 건물이 될 것이라 한다.
2016년 완공 예정인 '마케도니아 고고학 박물관'-
역시 '스코프예 2014년 프로젝트' 일환으로 건축 중에 있다.
슬라브족이 쓰고 있는 키릴 문자를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는 키릴 형제 동상-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로만
알려져 있으나 그는 마케도니아가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었다.
아들보다 앞서 그리스를 재패하고 동방 원정 계획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스코프예 구시가지 골목길-
스코페요새(칼레요새)-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Skopje)의 고지대에 있는 요새다.
석회암으로 지어지고 라틴 어가 새겨진 것을 보아,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 도시 스쿠피(Scupi; Skupi)의 유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유적을 기반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때 재건하고,
10세기~11세기에 확대 건설하여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1963년 지진으로 일부 무너졌다. 2006년 말, 정부 지원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었고,
요새 밑에 감춰져 있던 집채와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목관 악기,
찰흙 장식품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코페요새(칼레요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