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6일 오전 08:50
美·日서 어보·의궤·실록 연속 환수…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
생떼보다 팩트
빼앗긴 문화재 돌려받는 비법? 역사적 사실 찾아 들이미니 의외로 쉽게 돌려주더라
"日,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때 이미 한국에 반환할 문화재 목록 작성… 우리가 알고 요구했으면 되찾았을 것"
문화재 환수로 요즘 깃발을 날리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 혜문(慧門·40) 스님의 휴대전화 번호를 누르면,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곡 '송어(Die Forelle)'가 통화연결음으로 흘러나온다. 이 곡은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수십년 동안 '숭어'라고 쓴 교과서 표기를 2010년 정부에 정정 신청을 내 과(科)가 다른 물고기인 '송어'로 바로잡은 사람이 혜문이다.
세상 사람이 다들 "송어"라고 부른 클래식 명곡을 우리만 얼렁뚱땅 "숭어"라고 부른 것을 그는 어려운 말로 "사람들이 명구문(名句文·불교 용어)의 환상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재하지 않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언어의 환상을 말해요. 타성에 젖어 솥뚜껑을 보고 자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혜문 스님이 본 '명구문의 환상'은 그동안 숭어만이 아닌 듯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조계사 인근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10년 남짓 동안 거둔 성과"라며 그는 34번까지 리스트를 적은 A4 용지를 건넸다. '조선왕조실록 환수', '조선왕실의궤(儀軌·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해 경과를 자세히 적은 책) 환수', '이토 히로부미 대출도서 환수'처럼 굵직한 성과들이 눈에 들어왔다.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오늘날 혜문을 '문화재 환수 운동가'로 유명하게 만든 일들이다. 지난달 미국에서 60년 전 미군이 도둑질해간 '문정왕후 어보(御寶·왕가의 도장)' 반환 약속도 받아냈으니, 혜문의 성공 리스트는 조만간 35번까지 늘어난다.
혜문 스님이 문화재 환수운동에 뛰어든 것은 일본 교토 유학 시절, 일본의 조선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쓴 청구사초(靑丘史草)에서 오대산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반출돼 도쿄대에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였다. 한때‘식광(識狂)이 났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경전을 읽었지만, 그는 지금‘괴승’소리를 들을 만큼 세상을 휘젓고 다닌다.
리스트를 보면 그가 어떤 성정(性情)을 가진 승려인지 대략 알 수 있다. 2006년 삼성과 법정 다툼을 대판 벌여 삼성문화재단이 갖고 있던 현등사 사리구를 찾아온 일이 성과 7번, 201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맞붙어 조선 명월관 기생의 것으로 알려진 여성 생식기 표본을 폐기하도록 한 일이 성과 23번이다. '부시 기념식수 제거'가 26번에 올라 있어 '이게 뭔가' 조사해 보니, 2012년 12월호 국회보(報)에 다음과 같은 사연이 게재돼 있었다.
"1982년 국회를 방문한 조지 부시 미국 부통령의 기념식수가 민원을 샀다. 혜문 스님이 현재 나무가 방문 당시 심은 것과 같은 수종의 나무인지 확인해 달라고 하면서부터다. 확인 결과 주목이던 당시 기념식수는 고사(枯死)했고, 화백 나무로 교체됐다는 것이다. 화백 나무는 원산지가 일본이다. 국회는 민원을 받아들여 주목을 다시 심었다."
이번에도 혜문은 세상의 무심함, 즉 '명구문'을 시시콜콜 문제 삼는 것이다. 그는 그런 일을 "파사현정(破邪顯正·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의 자리를 찾는 것)"라고 말한다.
리스트에 기록된 첫 성과는 '유선방송 편파 방영 금지'였다.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니, 혜문은 "불교방송을 외면하고 기독교방송만 트는 유선방송의 관행을 바로잡은 거예요" 하며 신나게 웃었다.
◇생떼를 쓰지 않고 사실로 접근했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공개한 ‘오구라 컬렉션’중 하나인 용봉문 투구
지난 1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공개한‘오구라 컬렉션’중 하나인 용봉문 투구. 컬렉션 목록엔“왕실 최고위 층, 다시 말해 왕이나 왕세자가 착용한 물건임을 짐작하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 뉴시스
그는 "사흘 후 일본 도쿄로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일본, 다시 난처해지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도쿄로 간 직후 "고종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와 갑옷이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공개됐고, 도난품일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혜문의 코멘트로 국내에 쏟아졌다. 투구와 갑옷은 일본의 '문화재 도굴왕'으로 유명한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끌어모은 '오구라 컬렉션' 중 일부다. 오구라 컬렉션은 도굴당한 조선 문화재의 한 맺힌 수장고인 것이다.
하지만 여느 반일 운동가들처럼 혜문은 상대방을 향해 "내놓으라"며 호통만 치는 사람이 아니다. 성공률이 탁월한 이유에 대해, 그는 "생떼를 쓰지 않고 사실 관계로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교하게 합리적으로 접근하니, "달라니까 주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진가다.
"박물관이 10월 1일 투구를 공개한 것은 우리와 얘기가 잘됐기 때문이에요. 조선의 왕실에서 이어져 내려온 투구라는 것을 밝혔고, 도쿄국립박물관도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실 확인과 대중 공개를 거쳤으니, 이제 법적 논의를 진행해야죠."
―반환될 가능성은?
"실록, 의궤, 어보와 마찬가지죠. 우리가 사실 관계를 치밀하게 증명하면 일부가 반환될 수 있어요. 반환 문화재의 범주를 잡고 있습니다."
―반환 가능성이 있는 일부란?
"첫째, (투구처럼) 오구라 컬렉션엔 조선 왕실의 유물이 있어요. 해방될 때까지 조선 왕실의 물건은 (일본 궁내성 소속의) 이왕직(李王職)이 관리했어요. 그것이 반출됐다면 불법입니다.
둘째, 컬렉션 가운데 도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오구라 자신이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됐다고 밝힌 유물은 완벽하게 도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국립박물관이 이 사실을 알면서 받아들인 전형적인 사례예요.
셋째, 가야 유물 중에서도 도굴 정황이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컬렉션을 모두 내놓으라'고 하면 뒤로 물러설 테니까, '불법적인 것만큼은 가져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1922년 일제가 반출한 조선왕실의궤가 2011년 12월 6일 돌아왔을 때 인천공항에서 열린 환영 행사
◇상대의 良識을 인정하고 협상해야
상대를 미워하면 협상이 어렵다. 혜문의 성공률이 높은 첫 번째 이유는 상대방의 양식(良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어요. 한일협정(1965년) 당시 일본이 한국에 어떤 문화재를 돌려줘야 할지 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고 요구했다면 돌려받았을 유산이지요. 누군가 이 비밀의 파일을 열면, 일본은 (약탈 문화재를) 100% 준다고 확신해요."
―오구라 컬렉션도 그 일부?
"당시 일본 외무성은 오구라 컬렉션에 대해 '일본이 돈을 주고 구매를 해서라도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의견을 문서로 개진했습니다. 불법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게 오구라 컬렉션을 바라보는 일본 외무성의 입장입니다. 일본은 그런 의견이 있으면 존중하는 나라이지요."
―그런 방식으로 성공한 과거 사례는?
"조선왕실의궤는 열람을 신청하고 승인받을 때까지 여섯 달 걸렸어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인내이지요. 초원에서 양떼를 몰던 유목민의 후예라서 그런가, 하하. 의궤의 경우도 처음부터 '돌려달라고 달라'고 했으면, 의궤를 보여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상대의 법과 절차에 따라 요구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렇게 한 단계에 진입하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일본은 최소 3년은 해야 뭔가 성사되는 나라이니까. '사실 관계'라는 토대를 절대 뛰어넘지 말고 인내하는 것이 중요해요."
당시 일본 왕실이 보유하고 있던 의궤는 192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 왕실로 유출한 것들이다. 혜문이 환수를 위해 움직인 것은 2006년. 환수위원회를 만들고 일본에 반환요청서를 보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의궤를 열람하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언론에 공개한 것도 그해 모두 진행됐다. 그 후 국회 결의안을 내고, 북한불교도연맹과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 국회의원을 환수 운동에 동참시켰다. 그는 "과정이 책 한 권"이라고 말했다. 결국 일본 정부가 의궤 반환을 결정한 것은 4년 후인 2010년, 돌아온 것은 2011년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문화재 반환이 일단락됐기 때문에 정부(왕실도 정부) 소유의 문화재 추가 반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일 때였다.
"의궤가 돌아온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스스로 '잘못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떼을 쓸 게 아니라 상대방의 제도 안에서 그것을 정교하게 증명하면 돌려줍니다. 내가 아는 일본은 그런 나라이지요."
1. 경복궁에 있다가 1918년 일제에 의해 반출돼 도쿄 오쿠라호텔 정원에 있는 이천오층석탑 / 2. 반환된 조선왕실의궤 중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 / 3. 1913년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2006년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 / 4. 6·25 전쟁 중 미군에 의해 도난당했다가 60여년 만에 반환될 예정인 문정왕후 어보
◇결국 인연이 맞아야 성사된다
―경술국치 100년이란 시점 잘 활용했는데.
"결국 인연이 맞아야 성사돼요. 의궤 환수운동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2010년 8월에 시점을 맞춰놓고 2006년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상대가 무언가 하고 싶은 필요성을 느낄 때를 보는 것이지요."
그러면 2006년 도쿄대에서 환수한 조선왕조실록은 어떤 인연이 작동했을까? "그해 도쿄대 법인화가 이루어졌어요. 그전엔 국립대학이었죠. 국립대학이면 문부성(일본 정부)이 반환을 결정하지요. 계속 국립대였다면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에 따라 문화재 반환은 끝났다는 입장이니까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도쿄대 법인화를 기다렸지요. 문화재 반환운동의 두 가지 원칙은 사실 관계에 대한 완전한 증명, 그리고 인연과 시점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오구라 컬렉션'의 환수 목표 시점은?
"2015년. 한일협정(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북한과 종종 손을 잡던데.
"상대방이 '북한' 하면 깡패라고 생각하잖아요. 협상 카드로 얼마나 좋아요. 국제 깡패가 친구인데, 하하. 일본은 어떻게든 북한과 엮이려고 안 하니까요. 오구라 컬렉션도 한국에 주지 않으면 결국 북일 국교정상화 때 북한이 요구할 거예요."
◇미국의 문을 열어준 홀 여사
혜문 스님은 "문화재 반환 문제에선 미국과 일본에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도난 문화재에 대해선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2차대전 이후의 것은 합리적으로 처리하려고 한다"는 얘기다.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박물관(LACMA)이 반환을 약속한 문정왕후 어보 역시 치밀한 사실 관계 증명을 통해 반환이 성사된 사례다.
"문정왕후 어보가 발견된 즈음에 미국의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서 어보가 도난품이란 기록을 찾았어요." 2차대전이 끝난 뒤 나치가 약탈해간 각국의 유대인 문화재를 반환하는 문제가 생겼다. 미국이 이 작업을 주도했고, 그때 미 국무부 담당 관리가 유대인 여성 아델리아 홀이었다. 그가 남긴 도난 문화재의 기록이 '아델리아 홀 레코드'다.
"(홀 여사는) 6·25전쟁을 2차대전의 연장 선상에서 파악한 듯해요. 약탈 문화재를 조사하다가 6·25 때 미군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유대인 약탈 문화재 처리와 같은 원칙으로 접근했지요. 당시 그녀는 실제로 일부 문화재를 한국에 돌려줬어요. 약탈 문화재의 1%도 안 될 테지만 그래도…. 그녀는 세계 약탈 문화재 환수 문제에서 엄청난 역할을 한 유대인의 영웅이지요. 문화재 환수에 약간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나 바로 알게 되는 이름입니다. 그동안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주목받지 않았을 뿐이지요."
2009년 이후 그는 레코드의 한국 목록 확인을 위해 미국 메릴랜드 국가기록보존소를 두 번 방문했다. "'Korean official seals' 항목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보를 뜻하지요. 당시 양유찬(梁裕燦·1897 ~1975) 주미대사가 어보가 분실됐다는 신고를 한 내용이 실렸습니다. 어보 도난과 관련해 양 대사의 인터뷰가 실린 볼티모어선(지역 신문) 1953년 11월 17일자 기사도 있었는데, 마이크로필름이 뭉개져서 알아볼 수 없었지요. 볼티모어에 갔더니 신문사는 이미 사라졌는데 기사 검색은 날짜만 알면 가능했어요."
1953년 양 대사가 지역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까지 노력을 한 듯한데, 그 후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한 것일까. 혜문 스님은 "망각 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옛날 기사였을 텐데, 영어를 잘하나 봅니다.
"읽는 것 정도야. 성문종합영어가 원래 옛날 영어를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가르치잖아요, 하하. 현지 교민 도움도 많이 받지만, 자료를 찾는 것은 언어보다 서지학 지식이 더 중요해요. 승려이니까 전적(典籍), 고전을 보는 훈련은 잘돼 있지요."
그는 다른 자료에서 1951년 미군 헌병이 서울에서 '어보를 훔쳤다'는 이유로 미군을 체포하고 어보를 압수해 돌려준 기록도 찾았다. 그것은 단종의 어보였다.
"그건 다행히 찾은 것이고요. 당시 미국으로 간 도난 어보가 47개였어요. 1987년 3개가 돌아왔고, 2011년 하나가 서울옥션에서 경매됐어요. 나머지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43개 중 하나가 문정왕후 어보입니다. 나머지 42개 중 현종 어보만 (고미술품 수집가) 로버트 무어가 가진 것으로 확인됐어요. 문정왕후 어보를 LACMA박물관에 판 사람이지요."
―도난품이란 사실 관계가 입증된 뒤엔?
"2011년 미국에 반환 요청서를 보내고, 현지 교민회와 반환 운동 조직을 만들었어요. 정전 60주년이 되는 올해 승부를 보는 것을 목표로 네트워크를 만들고 행정소송도 준비했고요. 안민석 의원이 국회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정작 국회가 파행하면서 통과가 안 됐네요, 하하."
◇날 요승이라 한다, 세상 어지럽힌다고
혜문에겐 4대 환수 목표가 있다. 첫째 '오구라 컬렉션의 일부인 고종 황제의 투구와 갑옷. 둘째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한 고려시대 '라마탑형 사리구'(1939년 도굴된 뒤 일본에 반출된 것을 보스턴미술관이 매입). 셋째 중국 다롄시 뤼순박물관에 있는 금강산 장안사 종(1905년 일본군에 의해 금강산에서 반출), 넷째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이천오층석탑과 율리사지팔각석탑(일제강점기 반출) 등이다.
그는 왜 문화재 환수에 매달리는 것일까. "내가 찾는 문화재는 부당하게 빼앗긴 신물(神物)입니다. 혼이 들어간 물건, 꼭 그 나라에 있어야 하는 물건이 있어요. 실록처럼 민족혼이 담긴 문화재, 어보나 투구처럼 왕가의 문화재. 종교적 문화재들이죠. 해외로 나간 문화재를 무조건 가져오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한국관이 작다고 불평하는 것은 이율배반 아닌가요. 정당한 방법으로 값지게 팔려나가 잘 전시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건 어디에 있어도 한국 문화재이니까."
그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유한 '오타니 컬렉션'도 중앙아시아에 돌려주자고 주장한다. 오타니 컬렉션은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9~1948)가 중앙아시아에서 반출한 것들로, 총독부 박물관에서 전시하다가 전후 한국에 남은 문화재들이다. 대부분 부처님이나 보살상의 벽화들이다. 혜문에겐 영락없는 '신물'에 해당한다. 상대방이 돌려달라는 말도 안 하는데 혜문 스님은 "돌려줘야 한다"며 중국 지방정부를 찾아다니고 있다. 이번엔 우리 박물관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다.
"돌려주는 쪽이 이득입니다. 양심을 회복할 수 있으니까.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조선왕조실록이 우리나라에 2000책이 있어요. 도쿄대에서 그까짓 47책을 찾아왔다고 문화 선진국이 됩니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오타니가 훔쳐다가 놓은 것을 돌려준다고 우리나라 국력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지. 문화재 운동이란 소유권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회복 문제이지요. 또 그렇게 접근해야 승산이 있고."
"당신은 어떤 승려냐"는 질문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괴승(怪僧) 범주에 들어가지요, 하하. 경전만 읽는 승려, 참선만 하는 승려를 학승이라고 하는데, 그걸 거친 뒤에 다시 안 하면 괴승 범주에 진입합니다. 어떤 사람은 날 '요승(妖僧)'이라고도 했는데, 세상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라나,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