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소식

2013년 7월 30일 오전 06:50

tiger471 2013. 7. 30. 07:04


법의 심판대에 오른 ‘대서양 노예무역’… 이주·착취에 황폐,

발전의 ‘씨앗’은 없었다

ㆍ카리브해국가 흑인 노예 사망률, 출생률보다 높아
ㆍ강대국들 무역이익 줄자 노예제 폐지, 보상은 외면


카리브해는 대서양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카리브해의 비옥한 땅에서 사탕수수를

키우고, 그걸로 설탕을 만들어 유럽에 가져가 팔았다.

이 돈으로 옷가지와 술 따위를 사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와 맞바꾼다.

노예를 채운 배는 다시 카리브해에 도착해 새 노예들을 내려놓는다. 이런 ‘삼각무역’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무한 반복됐다.

현재 앙골라·나이지리아·세네갈 등이 있는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이 시기 대서양을 따라 900만명

이상이 카리브해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 28만명의 바베이도스, 면적 260㎢의 세인트키츠네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발견했다는 앤티가바부다, 아직도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는 과들루프와 마르티

니크. 이름도 생소한 이 나라들은 카리브해의 주요 노예 이주지였다.




18세기 중반 영국은 설탕 대국의 야심을 품고 자메이카를 중심으로 노예 농장을 대거 설립해 1680년

7만6000명 수준이던 노예 수가 1750년 29만5000명까지 늘어난다.

흑인 노예가 끊임없이 들어오면서 자메이카 원주민 비율은 19세기 초 23%까지 떨어졌다.

프랑스는 생도밍그(현재 아이티)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영국과 치열한 경쟁을 시작한다.

당시 이 지역 인구의 사망률은 출생률보다 높았다. 자메이카는 연평균 3% 인구가 줄었다. 이보다

작은 섬들은 4%씩 감소했다.

과로와 영양실조 탓이다. 노예들이 일하는 시간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였다.

자메이카로 건너온 영국인 지주 토머스 시슬우드는 1756년 7월30일 일기장에 도망갔다 잡혀 온

노예에 대해 썼다.

“펀치(노예 이름)를 솔트강에서 잡아 집으로 데려왔다. 채찍질을 하고 씻긴 다음 소금에 절인

피클과 라임주스, 후추에 문질렀다.

” 그의 이날 일기는 1786년 죽을 때까지 쓴 ‘잔혹사’의 일부일 뿐이다. 대부분 흑인인 138명의

여성을 희롱했고 당시 돈으로 3000파운드를 모았다. 이는 영국의 중산층 정도였다.

식민지를 운영했던 국가들이 얼마를 벌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동에 드는 비용이 많아

수익성은 낮았기 때문에 당시 영국 내 투자금의 1% 수준이라는 분석도 있다.

프랑스 국내 상업 수입률이 5% 수준인 데 반해 노예무역은 6%의 이윤을 보장했다는 연구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윤을 남겼다는 점이다. 설탕 무역의 수익률이 떨어지기 시작한 뒤에야 이곳에서

노예 폐지 주장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한 아이가 쓰레기로 막힌 하수구를 맨발로 건너가고 있다.

아이티를 비롯한 카리브해 섬나라들은 식민지배 시절부터 비롯된 경제적·사회적 모순에 지금까지도

시달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800년대 후반 카리브해 국가들은 해방을 맞았지만 황폐해진 땅 위에 아무것도 없이 던져진 꼴이었다.

이주와 착취는 이 지역에 가난만 남겼을 뿐, 발전의 씨앗은 심지 않았다. 아이티는 독재와 폭력, 재난과

빈곤이 결합된 지구상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수리남은 네덜란드 축구리그로

향하는 젊은 선수들이 유일한 ‘상품’인 빈국이다. 카리브해공동체(카리콤) 국가들의 지난해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8116달러에 불과하다.

2010년 1월 아이티 대지진 때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5600만유로의 채무를 탕감해주고 4000만

유로를 지원했다. 하지만 노예제 보상 요구에는 고개를 돌렸다. 내년 1월 카리콤 대표직에 오르는 세인트

빈센트그레나딘의 랄프 곤살베스 총리는 “회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상이 있어야 한다”며 “과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