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8일 오후 01:25
짜장면 발상지 '共和春'… 첫 불밝힌 팔미도 등대
1888년 근대식 자유공원 탄생… 호텔·기상대 등 최초 상당수
인천은 개항기 이후 우리나라에 외국의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다. 그런 만큼 인천, 특히 '개항장(開港場)'이라 불리는 인천항 주변 지역에는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진 유적이 적지 않다. 대부분이 인천 중구 지역에 있는 만큼 관할 중구청에서는 이들 유적을 돌아보는 '개항누리길'이라는 이름의 둘레길 코스도 마련해 놓고 있다.
◇자유공원과 그 주변의 '최초'들
경인전철의 인천 방면 종점인 인천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패루(牌樓)가 보인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중국인 마을'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공식 '중국인 마을'이 시작되는 곳임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150t의 돌을 이용해 11m 높이로 만든 이 페루는 인천시와 우호도시 관계인 중국 웨이하이(威海)시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이 문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면 자유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은 188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모여든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던 만국지계(萬國地界) 안에 만든 것이라 만국공원이라 불리다 1957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공원 가운데 서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자리는 원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독일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사택(직원용 건물)이 있었다, 1884년 지은 이 건물은 6·25 전쟁 때 함포사격으로 사라졌다.
차이나타운 거리의 패루. 중국식 전통 대문으로 건축과 문화예술이 융합된 상징물이다.
자유공원과 맥아더 동상. 1888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 의 근대식 공원이다.
중국인 마을에는 '국민음식'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옛 중국음식점 '공화춘(共和春)' 건물이 남아 있다. 중국 짜장면과 다른 한국의 짜장면은 1905년 이곳에 국내 처음으로 문을 연 청요리(중국요리) 전문점 '산동회관'의 주인인 화교 우희광(于希光)씨가 춘장에 국수를 넣어 먹는 중국식 짜장면으로 처음 선보인 것이라 전해 온다. 우씨는 그 뒤 1912년 중화민국의 공화국 출범을 기념해 가게 이름을 '공화춘'이라 바꿨으며, 6·25전쟁 직후 이곳에서 지금처럼 양파·고기·전분 등을 넣고 볶는 한국식 짜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 공화춘은 1984년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짜장면과 얽힌 역사를 기리기 위해 인천시가 이 건물을 짜장면 박물관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공원에서 중구청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개항기에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살던 지역을 가르던 조계지(租界地) 경계 계단이 있는데, 그 앞에 대불(大佛)호텔 터가 있다. 2011년 지하실과 계단 등이 발견된 이 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었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885년 이전에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1885년 인천에 들어온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이곳에 묵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일본인 경영하는 인천의 다이브츠(大佛)호텔에 묵었는데 종업원들이 영어를 잘 했고, 서양식 음식도 맛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공원에서 제물포고등학교쪽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인천기상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다. 1904년 문을 연 인천기상대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와도 기상 정보를 주고받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애관극장' 등 다른 곳에 있는 '최초'들.
자유공원에서는 좀 떨어진, 동인천역에서 멀지 않은 경동에 애관극장이 있다. 이 극장의 출발은 1895년에 생긴 공연장 '협률사(協律舍)'이다. 이는 1902년 조선왕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공연장 '협률사(協律社)'나 1908년 이인직이 세운 '원각사'보다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극장)이다. 이곳에서는 인형극, 신파극, 창극, 남사당패 공연 등이 열렸다. 이곳은 그 뒤 '축항사(築港舍)'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애관극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협률사의 원래 위치는 지금보다 좀더 위쪽이었으나 6·25때 불이 나 없어지는 바람에 지금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은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소풍갈 때 필수품이었던 사이다는 지금의 중구 신흥동에 있던 '인천탄산수제조소'에서 1905년 '별표사이다'로 처음 태어났다고 한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많아도 고뿌(컵) 없이는 못 마십니다'하는 옛 만담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 떨어진 팔미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서 있다. 1903년 6월1일 처음 불을 밝힌 이 등대는 높이 7.9m, 지름 2m로 규모다. 이 등대는 특히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3년 그 옆에 새로 만든 신형 등대에 임무를 넘겨주고 100년만에 퇴역했으며,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移民)은 1902년 12월22일 인천항에서 미국 상선 '게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떠난 102명이었다. 인하대학교는 이렇게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이 교육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며 보내온 성금을 바탕으로 만든 학교다. 그래서 학교 이름이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합쳐 인하대가 됐다. 이같은 이민의 역사는 월미도에 있는 이민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내거 태어나고 26년간을 지낸곳이 인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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